[엄상익의 시선] “싸움은 맷집이다”

중학교 입시를 막 치고 났을 때였다. 이제 한숨을 돌리며 놀 수 있나 싶었는데 엄마가 나를 유도 도장에 보냈다. 뚱뚱하고 물러터져서 좀 야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사범에게 특별 부탁을 했다. 나를 매일 스무번 정도 패대기 쳐달라고 했다. 운동이 아니라 폭력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가벼워지고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맷집이 생긴 것 같았다. 싸움은 맞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때려 죽일 용기보다 맞아 죽을 각오를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중학교 시절 밴드부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만두고 싶었다. 밴드반 반장은 나에게 나가려면 30대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폭력의 공포로 나를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나는 맞겠다고 하고 악기실 구석에 가서 엎드려 뻗쳤다. 대걸레의 단단한 나무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나의 엉덩이로 날아왔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버티는 나에게 도중에 주먹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30대를 다 맞았다. 맞았어도 나는 다시 얻은 자유가 더 좋았다. 그 시절 나는 요즈음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에게 칼을 맞기도 했다. 폭력 자체보다 재벌 아들이라 처벌이 면제되는 불공정을 보면서 나는 매보다 더 강한 정신적 폭력을 당한 느낌이었다.
사회에 나와 나는 변호사가 됐다. 사회에는 또 다른 형태의 교활한 폭력들이 존재했다. 어떤 판사는 자신이 갑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법정에서 막말로 공개적인 망신을 주기도 했다. 말로 패는 폭력이 중학교 시절 대걸레 자루나, 일진의 칼보다 더 아팠다. 학교폭력은 멍이 들었지만 말폭력은 영혼을 다치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회에서도 맷집을 키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공책을 한 권 사서 ‘수모 백번 감당’이라고 제목을 적었다. 세상이 주는 수모의 매를 적어가면서 일단 백번까지는 참겠다는 의도였다. 적어가면서 맞으니까 독특한 소득이 있었다. 매를 맞는 순간 내가 객관화되는 것이다. 내가 왜 맞는 것인지를 살피면서 감정이나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를 번다는 말이 있다. 나는 맞는 매의 종류를 추가하기로 했다.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하는 글을 썼다. 그러다 감당하기 힘든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 기자들의 취재 태도에 대해 개인적 논평을 글로 쓴 적이 있다. 그게 ‘언론이라는 벌집’을 건드렸다. 나를 욕하는 일간지 기사가 쏟아졌다. 사설에서도 나를 비난했다. 방송뉴스 자막에 나를 공격하는 내용이 흘러가기도 했다. 언론의 힘을 실감했다.
한 메이저 일간지의 논설실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예고했다.
“너에 대해 지금 쓰고 있는 중이니까 한번 기다려 봐.”
그의 어조에는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 다음날 그가 쓴 칼럼이 나왔다. 쌍욕만 안 했을 뿐이지 내용은 더 잔인했다. 그가 쓴 결론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 유치한 글을 쓰는 인간이다. 군 장교와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인간이 어떻게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는지도 의문이다.”
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었다. 언론은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이었다. 내 스스로 자초한 매였다.
성경을 보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기본 트레이닝 과정은 욕먹고, 얻어맞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도 마귀라는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했다. 돌에 맞을 뻔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끌려가 절벽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고 십자가형을 받았다. 십자가는 삶에서 맷집을 키우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얼마 전 해외에 사는 어린 시절의 친구가 카톡으로 안부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 “중학 시절 네가 학교에서 재벌 아들에게 칼로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에 대한 학교의 처벌이 없다고 울면서 법관이 되어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네. 꿈을 이루었더군.”
나는 군 장교와 정보기관에 있으면서 힘의 생리를 반면교사로 배웠다. 그리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나를 뭉갠 논설실장은 조직의 배경 없이 한 개인이 맞아죽을 각오를 하면서 추구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까. 같이 노인이 된 지금 만난다면 술 한잔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