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철학자 도장 깨기]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익히 알고 있는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맹가(孟軻)와 순황(荀況) 두 사람의 두 가지 학설은 너무 익숙하여 거론할 가치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바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두 학설에 대한 반론과 재론을 지켜보면서 한 번쯤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성(性)’은 ‘생긴(生) 그대로의 마음(心)’, 즉 인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성이 본시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정 지었던 두 학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전국 활성 시대 활약한 맹자
먼저 맹자(B.C. 372?~B.C. 289?)는 공자(孔子) 사후 100년쯤 뒤에 태어났는데, 그가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인 전국(戰國) 시대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 시대는 주(周)나라 왕실과 제후 간의 위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지만, 맹자 당시의 전국 시대는 더 이상 주나라 왕실의 회복을 바랄 수 없었고, 여러 제후들이 천하를 놓고 겨루는 형국이었다. 당시의 군주들은 부국강병과 영토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도덕정치론은 실행되기 어려웠다. 결국 맹자는 자신의 사상을 실현해줄 군주를 만나지 못한 채 고국 노(魯)나라로 돌아와야 했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제자들과 함께 <맹자>를 저술하였다.
<맹자>에 보이는 주요 사상은 인의(仁義)사상, 성선설(性善說), 인정론(仁政論), 민본주의(民本主義) 등인데, 특히 인의사상이나 성선설은 공자 학문의 발전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仁)만을 강조한 반면, 맹자는 인의를 함께 고(告)했으며, 인(仁)·의(義)·예(禮)·지(智)를 사람의 본성이라 하고, 사단(四端)의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여 사람의 본성과 마음에 대하여 본격적인 천착에 들어간다.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다.
사람이나 동물을 측은해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자신의 불선(不善)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선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남에게 양보하고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사양지심), 선과 악을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 이 네 가지 마음이 바로 사단이다(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변 참조).
“선한 마음의 본성은 사단”
단(端)은 실마리라는 의미인데, 사단은 인·의·예·지의 4가지 덕이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다가 그것이 밖으로 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 실타래의 끄트머리와 같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타래를 풀려면 실의 첫머리를 찾듯이, 선한 본성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이 바로 이 네 가지 마음인 것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을 확인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인·의·예·지의 선(善)함임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은 본성의 선함을 일상적 마음을 통해 증명하므로 쉽게 이해되고 널리 적용된다. 이것이 이 사상의 위대함이다.
맹자는 이러한 성선설을 바탕으로 도덕적 수양과 행위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본성인 사단을 확충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도덕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욕망을 절제하는 등의 수양 방법을 제시했다. 또한 ‘효도 효(孝)’와 ‘공경할 제(悌)’로부터 시작하여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에게 내재된 선한 본성을 전제로, 이를 계발하고 실천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완성과 더불어 사회적 질서와 화평을 이룰 수 있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시대 말기에 활약한 순자
한편 순자(B.C. 315?~B.C. 236?)는 맹자보다 근 3세대 뒤로 7대 강국이 중국의 천하 통일을 지향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했던 전국 시대 말기 때 학자였다. 이때는 맹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복잡하고 힘에 의한 질서유지가 더 필요했다. 말이나 도덕으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순자는 도덕보다 더 강한 강제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순자도 맹자처럼 예의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가 의미한 예의는 일종의 강제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그의 선이란 모두 후천적 작위에 의한 것이라는 성악설의 주창자였다. 그의 저술 <순자> 중 ‘성악편 1장’을 보자. 인지성악 기선자위야 금인지성 생이유호리언 순시 고쟁탈생이사양망언(人之性惡 其善者僞也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 故爭奪生而辭讓亡焉)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까닭은 작위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
앞의 주장처럼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순자에 따르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타인을 질투하며 자신의 욕구를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의 타고난 욕구는 다툼과 갈등을 초래하게 되므로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선은 인위의 결과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이를 그대로 따르면 다툼과 탈취가 생겨나고 양보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선한 행동이나 도덕성은 교육과 예의를 통한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보았다. 순자가 볼 때,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을 가지고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을 좋아한다. 만약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른다면 중독과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조리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순자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과 달리, 인간의 도덕성은 후천적인 노력과 교화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예와 같은 사회적 제도와 규범에 의해 규제되고 순화됨으로써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본능도 교화로 순화 가능”
물론 순자는 무조건적인 성악설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인정했다. 자연스러운 본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전제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인간의 본능에는 악의 가능성이 있어, 본능만을 인정하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악이 용인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순자는 유가의 방식대로 ‘예악(禮樂:도덕적인 교화)’를 위한 교육을 강조했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 악의 가능성이 있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정리해 보면, 맹자는 “인간은 본래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났기에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해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한 마을을 갖고 태어났지만 배움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은 대립구도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이 말하는 본성이 ‘인간의 이성’을 가리킨다면, 순자의 성악설이 말하는 본성은 ‘인간의 본능’이나 ‘욕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기에 맹자는 이성을 잘 보존하려면 인의에 기초한 교화가 절실하다고 설파한 반면, 순자는 본성을 잘 다스리려면 예법에 따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두 사람이 강조한 방향은 한 곳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거의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참조]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2>맹자 著 배병삼 譯註 사계절 刊 <맹자, 마음의 정치학 1>
맹자 著 부남철 譯註 태학사 刊 <맹자정독>
우치야마 도시히코 著 석하고전연구회 譯 돌베개 刊 <순자교양강의>
촤종엽 著 유노북스 刊 <오십에 읽는 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