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또다시 을사년’…”변화와 쇄신, 지혜와 생명력 넘치는 2025년 함께 만들길”

<빈상설>(鬢上雪)은 1908년에 이해조가 발표한 신소설이다. ‘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뜻하는 제목의 이 소설은 처첩(妻妾)의 갈등 때문에 몰락해가는 북촌 부잣집을 소재로 개화기의 혼란상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 ‘을사년시럽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3년 전인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울분에서 ‘을사년시럽다’는 말이 생겨났고, 그 뒤에 ‘을사년→을시년→을씨년’으로 변했다고 한다. 120년 전의 을사년은 우리 겨레에게 을씨년스러운 해였음이 틀림없다.
올해도 을사년, 뱀띠 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로고는 뱀 한 마리가 감겨있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 물고 온 약초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렸다고 한다. 뱀이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 된 이유다. 미국 육군 의무대의 로고는 뱀 두 마리가 기어오르는 헤르메스의 지팡이 카두케우스(caduceus)다.
헤르메스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신들의 뜻을 알리는 전령이다. 신약성서에는 이방인들이 사도 바나바를 최고신 제우스로, 사도 바울을 제우스의 대변자인 헤르메스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사도행전 14:11,12). 클림트의 <히계이아>(Hygieia)에도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을 마시는 뱀이 그려져 있다. 히계이아는 위생과 건강의 여신이다.
신진대사가 되지 않는 뱀 껍질은 시간이 흐를수록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속살이 터져 죽고 만다. 뱀은 허물을 벗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뱀은 오래전부터 치유와 재생의 상징이 되었다. 동양에서도 허물 벗는 뱀을 변신과 지혜의 영물로 여겼다.
우리 조상들은 집 안 어딘가에 머무르던 텃구렁이가 떠나면 재앙이 닥친다는 주술적 터부를 지니고 있었다. 뱀은 이집트 신화에서도 불사의 존재로, 불교적 전승에서는 윤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 해에도 여러 번 허물을 벗고 다시 새 몸으로 성장해가는 뱀은 재생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고, 알을 많이 낳는 다산성 때문에 복과 풍요의 화신으로도 인식되었다. 뱀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둥근 모습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원초적 율동, 삶과 죽음의 윤회라는 문화적 변신으로 읽히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뱀이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에게 나라의 패망을 내다본 예언의 능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독일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F. Kekule)는 뱀들이 사슬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춤추는 꿈을 꾸고 나서, 탄소 여섯 개와 수소 여섯 개로 고리를 이룬 육각형의 벤젠 구조(C6H6)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많은 뱀이 독을 품고 있다. 코브라와 바다뱀은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신경독을, 방울뱀이나 살모사는 근육과 모세혈관을 망가뜨리는 출혈독을 지녔다. 모두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치명적인 독이다. 그런데 까치살무사라고 불리는 칠점사의 맹독에서 항암물질을 추출하는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한다. 치명적 질병인 암을 치료하는 약이 치명적인 뱀독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약이라니, 그야말로 파르마콘(pharmacon)인 셈이다.
약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르마콘(φάρμακον)에는 독이라는 뜻이 함께 들어있다. 영어의 파머시(pharmacy, 藥學)가 여기서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진리의 양약을 주었지만, 정치꾼들의 선동으로 이성이 마비된 민중은 그에게 죽음의 독약을 쏟아부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인류정신사의 파르마콘이 되었다.
“너무 길다.(Trop long)” 쥘 르나르(Jules Renard)가 단 두 개의 단어로 쓴 <뱀>이라는 시다. 뱀으로부터 비롯된 죄의 역사가 오래도록 길게 이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으로 나타난 악령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세기 3:5)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뱀은 선으로, 하나님은 악으로 판단했다. 선과 악이 부딪치는 뒤틀린 인간 역사의 시작이다.
허물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썩어가는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나라와 사회도 생명력을 잃고 만다. 같은 시냇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밖에서 무엇이 들어오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가가 문제다.
계엄과 군중시위, 현직 대통령의 구속과 탄핵심판 등으로 몹시도 어지러운 이 나라가 안으로 정녕 무엇을 품고 있는지, 갈등과 혼란의 독 껍질을 둘러쓰고 있지 않은지, 화합과 상생의 새 몸으로 거듭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새해가 되기 바란다.
을사년 올 한 해가 1905년처럼 을씨년스러운 독사, 그 악령의 해가 아니라 딱딱한 껍질을 벗고 새 몸을 입는 변화와 쇄신의 해, 현실의 암담한 부조리를 과감히 뚫고 나가는 지혜롭고 생명력 넘치는 푸른 뱀의 해로 다가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