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염무웅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민영 강민 고은 박해석 정호승 김지하김수영 신경림 김남주 송기숙 이성선

[아시아엔=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나의 2025년은 염무웅 선생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민영 강민 고은 박해석 정호승 김지하의 시를 논한 뒤에, 이성혁 평론가와 ‘현대시의 난해성’에 대해 대담한다. 2부에서는 김수영 신경림 김남주 송기숙 이성선의 시를 논한 뒤에, 유성호 평론가와 ‘시대정신으로서의 문학; 그 역사와 과제’에 대해 견해를 말한다. 제3부에서는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 한국문학과 세계의 만남, 문학비평가의 길 등에 대해 논하고, 남북작가대회 전말, 한국작가회의가 걸어온 길, 한국문학관의 건립 배경을 설명하고 있으며, 아울러 소설 <임꺽정>의 언어, 말에서 글에 이르는 길 등도 살피고 있다. 이 밖에도, 현대문학 소사와 김수영에 대한 백낙청 교수와의 대담도 부록으로 실었다.
문학 강의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이성혁이나 유성호 평론가와의 대담이 문학세계를 흘겨보는 좋은 장이 되었다. 물론 여러 시인을 살피며 툭툭 던지는 화두에서도 많은 걸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한국문학의 이해’라는 3학점 짜리 좋은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염무웅 선생에 따르면, 시인 신경림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 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부인은 세 아이를 두고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할머니와 부친은 작은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치매와 중풍을 앓았으며, 결혼하지 않은 두 동생까지 얹혀 살았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 혼자서 오롯이 감당했고, 돈벌이는 신경림이 도맡아야 했다.(186쪽) 신경림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낭인처럼 여기저기 떠돌았다. 공사판 같은 데서 막노동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에겐 그걸 감당할 체력이 밑받침되지 않았다.(183쪽)
세상의 밑바닥을 떠돈 신경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해 원망이 가득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183쪽) 그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 신경림이 발견한 것은, 자신이 그 일원이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존재, 즉 억압 받는 민중이었다.(183쪽) 그런 발견을 통해 신경림은 그 시대의 한국인 누구나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를 쓰게 되었다.(188쪽)
그런 발견은 신경림 시인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김수영도그랬고, 월남한, 전쟁과 피난을 겪은 민영도 그랬다. 이 책에서 거론한 다른 문인들도 별로 다른 바 없었다. 가난 위에 반란과 형벌(102쪽)의 족쇄까지 덧씌워진 고장 전라도에서 태어난 송기숙 김지하 김남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문인들이 얻은 지위와 명성은 염무웅 선생에 따르면, 허리가 휘도록 일한 부모 세대의 희생 없이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었다. 적잖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모태를 떠나 자기 배반의 노선을 걸었으나(205쪽) 위에서 든 문인들은 그들이 겪은 결핍과 억압을 문학의 자양으로 삼아 시나 소설로 승화시킴으로써 모태를 지켰다. 김지하나 김남주 같은 시인은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흉내 내기 어려운 해학까지 곁들여, 진보적이고 전투적이고 혁명적이면서(218쪽), 낙천적이고 품격 높은 서정성을 펼쳐 보였다. 마음의 항산(253쪽)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 비판적인(144쪽)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러나 염무웅 선생이 말했듯이. 자신이 사는 인생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79쪽) 나는 은퇴한 뒤에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것들도 내 삶의 울타리를 뛰어넘기 어려울 것이다. 과유불급이다. 나는 겸허하게 내 수준에 맞는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