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사건속 사람들] 1994년 울시 CIA국장 극비 방한 뒷얘기

1994년 1월 19일 오후 2시59분께 국방부 청사 현관을 들어서고 있는 제임스 울시 CIA국장 <사진 한겨레신문 이정우 기자>

1994년 1월20일 <한겨레신문> 1면에 ‘서울에 나타난 미 중앙정보국장’이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긴장감 넘치는 사진이 실렸다. 북핵 문제로 한반도 정세가 급박하던 당시 제임스 울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한국을 극비 방문, 국방부 청사를 들어서는 장면이 한겨레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당시 국방부 출입기자로 이 사진과 관련된 전말을 소개한다.

앞서 1월 4일께 필자는 지금은 고인이 된 H국장 방에 신년 인사차 들렀다. 요즘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김대중 정부 때까지만 해도 실국장은 물론 장차관실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던 H국장(육군 소장)이 “뭐 그리 의전이 까다로운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장군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뭐…” “
누가 오나보죠? 그냥 하시면 되지요, 뭐. 근데 누군데요?”
“아니…”
“누구길래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요. 거 참?” 하고 나서는 척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궁금하네요, 장군님”
“아, 뭐 미 CIA 국장이 온데요, 요즘 북핵 너무 시끄럽잖아요. 그래서 장관님 만나 협의할 게 있어…” “아, 근데 언제 오죠?”
“19일…”


나는 기자실로 돌아와 메모를 해놓고 다른 실국장 방을 다니며 신년 인사를 했지만 울시 방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주무 국장한테 들은 얘기인데다 미 CIA국장의 방한에 대해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름 뒤 평소대로 9시30분경 기사 보고목록에 제임스 울시 국장의 국방부 방문 기사를 발제했다.

10시반경 이용선 사진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형, 울시 국방부 몇시에 오지?” 아뿔사 시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모처에 전화해 오후 3시라고 확인, 통보 후 기사를 작성해 11시경 일찌감치 기사를 송고했다. 당시는 기자들에게 노트북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팩스로 전송하거나, 전화로 일일이 기사를 내근자에게 불러주는 방식이었다.

CIA국장의 국방부 방문은 극비사항이어서 기사 내용은 1월 초 H국장한테 들은 걸 조합하는 정도를 넘지 못했다. 나는 사진부장의 전화를 받고 ‘사진기자가 오는구나’ 하는 것과 ‘타사에서 모를 것 같다. 그러면 한겨레신문 특종이잖아?’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날은 마침 1993년 말 권영해 국방장관의 경질사태까지 몰고온 ‘군수본부 포탄사기사건’ 여파로 후임 이병태 장관이 설치한 ‘군수비리특별검열단’(특검단) 장병용 단장(육군중장)과 기자실 점심이 예정돼 있었다. 전년도 말 포탄사기사건 취재로 매일 늦은 귀가를 해야 했던 출입기자들은 국방부 후문 쪽 N횟집 신년 첫 회식에서 군납양주와 맥주로 만든 폭탄주를 10잔 이상 기분 좋게 마시고 기자실로 복귀했다. 영하 10도 날씨에 노출됐다 기자실에 돌아온 기자들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오후 3시 조금 넘은 시각, 공보관실 H주사가 내게 필름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니 CIA국장 사진이 나가면 어떡합니까?” 하며 한겨레 사진기자한테 받은 거라고 했다. 나는 사진부장한테 전화해 다급한 목소리로 “CIA국장이 3시30분 나간다니 사진 다시 찍을 수 있어요” 했다. 이용선 부장은 “아, 걱정 말아요. 지금 필름 갖고 회사로 들어오고 있어”라고 했다.

곧 전모가 드러났다. 당시 선배인 이종찬 기자와 후배 이정우 기자는 사진부 취재차량을 타고 국방부 청사를 들어와 울시 국장 일행이 청사 현관을 들어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종찬 기자는 주차장 차량 사이에 숨어 있던 이정우 기자가 촬영에 성공하도록 한껏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그 사이 이정우 기자는 여러 컷을 찍어 구두에 감춘 후 경호원들 눈에 일부러 노출된 후 필름을 건넸다. 말하자면 경호원들도, 한겨레 기자들도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다만 한겨레 기자들의 기지가 조금 더 앞선 것이었다.

두시간쯤 지난 후 5시30분경 안기부에 파견 근무 중인 L육군소장이 보자고 한다. “이형, 그거 나가면 국가안보에 치명적이요. 사진은 안 돼요.” 나는 그에게 두가지로 답했다. “이미 AP, AFP, UPI통신 등에서 저희 회사에서 사진을 전송받아 갔다고 합니다. 빼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안보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미국 CIA국장이 북핵 문제를 한국정부와 풀려고 한국에 왔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안심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날 저녁 7시반께 가판신문이 국방부에 도착한 후 장관보좌관 C장군이 전화를 해왔다. “이형, 사진에 ‘울시 국장이 국방부 청사를 들어서고 있다’고 돼 있던데 국방부를 빼줄 수 있을까?” 물론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 6하원칙에 벗어나는 것이어서 들어줄 수 없었다.

이달의보도사진상을 수상한 이정우 기자의 제임스 울시 미 CIA국장 극비 방한 사진과 상패

이튿날 모든 조간신문과 방송은 한겨레신문의 울시 사진을 ‘한겨레신문 제공’이란 바이라인을 달아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외국 매체도 마찬가지였다. 20일 오전 공보관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청와대를 다녀온 이병태 국방장관이 김영삼 대통령한테 크게 질책을 받고 돌아와 관계자들 전원 문책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미국측의 강한 항의를 받았고…

나는 2층 장관실로 올라갔다. 장관보좌관 C장군에게 짧게 얘기했다. “누구도 문책하지 않도록 해달라. 사진은 해외매체까지 보도되면서 한미동맹이 굳건하다는 걸 안팎에 보여줬고, 국민들의 안보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종종 기자들이 써먹는 말대로 “나는 국방부와 장관님에 대해 기사 쓸 거 몇 개 갖고 있다”고 했다. 제임스 울시 CIA국장이 국방부에서 찍힌 사진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국방부 헌병대장은 훗날 육군헌병감이, H주사는 병무청으로 옮겨 서울병무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무리 했다.

한국사진기자회 주최 제31회 보도사진전 금상을 수상한 이정우 기자. 당시 사진기자회장은 70대 중반에도 카메라를 놓치 않고 있는 고명진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이었다. 고 관장이 1987년 6월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찍은 태극기 들고 달리는 청년 사진은 로이터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사진에 들었다. 상패 오른쪽 위는 이사 가면서 깨졌다고 한다. 

한겨레 사진기자들은 사진부장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후배에게 사진기자협회가 주는 올해의 사진기자상을 양보한 이종찬 기자는 10년 전 부안 고향으로 내려가 농산물 유통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이정우 기자는 2023년 한겨레 정년 후 작년 <뉴스프리존>에서 사진도 찍고 기사도 쓰는 멀티 기자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당시 이병태 장관은 2024년, H장군은 육사교장과 수방사령관 등을 거친 후 2004년 유명을 달리했다.

2011년 제임스 울시

1941년생인 울시는 1995년 CIA국장 퇴직 후 대학과 기업 등에서 교수, 고문 등으로 일하다 2016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수석고문을 지냈다. 2021년 4월 바이든 행정부의 제재와 관련해 러시아 입국이 공식 금지됐으며, 그해 출간된 책에서 “소련이 존 F.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고 위키백과는 기록하고 있다.

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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