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섬진강에서 김문수 의원과 나눈 몇 마디의 여운이…

살다가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다가올 때가 있다. 2004년 여름 작열하는 팔월의 태양 아래 폭염 속을 걷고 있는데, 웬 전화가 걸려왔다.
“신정일 선생님이시죠?”
“누구신데요?”
“한나라당 당삽니다.”
“무슨 일이시죠?”
“이번에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대표를 비롯 121명의 국회의원이 전남 곡성 섬진강에서 영호남 화합을 위한 연찬회를 하는데, 우리 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걸으며 강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기분이 묘했다. 내 놓을 것도 별로 없는 내가 그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서 강연을 한다. 자신이 있고없고를 떠나 정치적인 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 그러시죠?”
“나는 열린우리당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한나라당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세 번을 거절했다. 그런데, 네 번째 포항지역에 지역구를 둔 이병석 국회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신정일 선생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정일 선생님, 한나라당이 변화해야 대한민국이 변한다. 이런 주제로 강연을 해주실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나라당이 변화하고 모든 당이 변화해야 이 나라가 변화할 테니까? 약속한 날이 왔다. 8월 말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한나라당 의원들을 남원 만인의총에서 만났다. 만인의총 참배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박근혜 대표 옆에 앉아서 섬진강으로 행했다. 이런저런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장에 도착하자, 강바람이 잔잔히 불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늦여름이라 더웠다. 강가에 자리잡고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때 문득 양말을 벗고 탁족을 하면서 강연을 하고 하면 어떨까 싶어, “날도 더운데 양말을 벗고 탁족을 하면서 합시다” 했더니 “좋습니다” 하고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만 안 벗는 것이었다. “왜 박 대표님은 양말을 안 벗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저는 이대로 강연을 들을게요” 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강과 길’이었다, 우리나라 강의 역사, 오늘의 현황, 그리고 강을 인문학적으로 풀어 한 시간쯤 강연을 했다.

강연의 묘미
강연을 마치고, 물러 나오자 제일 먼저 김문수 의원이 큰 노트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저도 성경을 많이 읽은 편인데, 아까 선생님이 말한 사도 바울의 ‘나는 매일 죽노라’라는 구절을 왜 읽지 못했을까요. 이 노트에다가 사도 바울이라고 쓰지 말고, 신정일이라고 싸인을 해서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써주십시오” 했다.
그 노트에 글을 쓰고 있는데, 맹형규 의원이 여자 국회의원들과 여럿이 내게로 다가오며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오늘 강연 재미있었는데요. 남자는 매일 죽으면 큰일 나잖아요.“
내가 말한 ‘나는 매일 죽노라’라는 말의 의미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그 말과 같은 의미로 매일 새롭게 흘러가고 흘러가는 강의 의미를 강조한 말이었다.
맹형규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부산의 모 국회의원이 대구의 모 국회의원에게 “의원님 내게 약값을 주셔야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왜요?” 하고 되받았다. “강연 중에 신정일 선생님이 낙동강 유역에서 회자되는 말을 했잖아요? ‘안동 똥물 대구 사람들이 먹고, 대구 똥물 부산 사람들이 먹는다고, 그래서 그런지 내가 장이 안 좋거든요. 약 사먹게 약값을 주어야지요?” 그 말을 들은 대구 지역 국회의원이 한 마디 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는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산삼 썩은 물을 먹으니 오히려 산삼 값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지요?”
나는 그들의 대화를 보며 국회의원들이 정말로 말을 잘한다는 것을 몇 마디 말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곧 바로 원주가 지역구인 이계진 의원이 내게 다가왔다. 이계진 의원과는 오래 전부터 방송을 여러 번 했던 터라 구면이었다.
“선생님, 강연 중에 했던 말, 강의 덕목은 겸손이라는 말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만 내려가는 강의 순리, 그것을 정치를 하건 안 하건 나의 마음 속 지표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때 이재오 의원이 내게 다가와 시니컬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강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 국회의원이 내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보자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다. “선생님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헤르만 헤세를 무척 좋아했었거든요. 의과대학교에 들어가 공부에 몰두하면서 잊혀졌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오늘 섬진강변에서 들을 줄이야” 내게 말을 건네는 여성 국회의원은 50이 넘은 나이일 것 같은데, 마치 소녀시대로 돌아간 듯 들떠 있었다.
강연 중에 나는 강물은 듣는 곳에 따라서 들리는 소리도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싯다르타>의 본문 속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다.
싯다르타가 강가에서 배운 것은 ‘기다리는 것과 참는 것과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그 세 가지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세상을 꿰뚫어보고 세상을 경멸하는 건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심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강을 주제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의미를 포착해 자기만의 기억들을 되살려냈다. 그것이 바로 강연의 묘미라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강연이 끝난 뒤 한 시간쯤 바람 부는 섬진강 변을 같이 걸었는데, 한나라당은 집권하자마자 대운하를 이야기하다가 4대강 사업을 실시했으며, 그 뒤 온 나라에 걷기 붐이 일기 시작했다.
2023년 1월 24일 겨울 섬진강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