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나는 어디에 뼈를 묻은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창세기 50장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골품제도에 나오는 최상위 계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금수저, 은수저와 더불어 출생한 집안 배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원래 성골, 진골이라는 것은 풍수지리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지리적 특징과 인간의 길흉화복을 연결시키는 것이 풍수지리입니다. 풍수지리에서는 조상의 뼈를 묻는 장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골이란 부모님의 묘를 최고의 명당에 모실 수 있는 계급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왕족이 성골이었습니다. 이른바 ‘뼈대 있는 가문’입니다.
그런데 묫자리가 꼭 그 사람이나 그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 능력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골을 안장할 장소를 정할 때 고인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의 뼈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고인이 직접 유지를 남기기도 합니다.
‘뼈를 묻을 각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분야에 한 몸 바쳐 헌신하고자 하는 다짐을 뜻합니다. ‘뼈를 묻는다’는 말 속에는 인생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무엇인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끝 부분에는 요셉의 유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집트에서 떠날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나가달라고 합니다. 이집트 총리쯤 되었으면 이집트에 뼈를 묻는 인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집트에 뼈를 묻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총리로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자신의 뼈를 묻고자 하는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본연의 정체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해골)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사셨습니다. 그 당시 갈보리는 저주받은 흉지였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곳은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갈보리 언덕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마지막 호흡을 다하셨습니다.
묻히길 원하는 곳, 그것은 그 사람이 어디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았는지를 말해줍니다.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뼈를 어디에 묻어야 할까요? 나는 어디에 뼈를 묻은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