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 칼럼]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를 아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난 이상 자기의 삶을 가장 온전하게 사는 것, 그런데, 선출직 공무원이나 직장에 매어 사는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바대로 자유인이 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노에처럼 사는 것이다. 오랫동안 막역莫逆하게 지낸 송하진 전 전북지사가 현직에 있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나는 노예”라며 자조하였다. 그 뒤 전북지사를 내려놓은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신정일 선생, 나 이제 자유인이 되었어.” 내가 이렇게 답했다. “이제 자유인으로 이모작을 잘 해야 합니다.” “알았어.” 그 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 한글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끔씩 산천 유람에도 나서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변신인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새롭게 부활했으니…(본문에서) 송하진 지사는 이제 전국을 유람하며 너럭바위에도 털썩 앉으며 말 그래도 여유로운 삶을 만끽할 것 같다. <사진 신정일>

오늘날 사람들이 선망하지만 가끔은 뭇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치단체장(도지사, 시장, 군수) 대기업 대표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참 신기하다. 비서실에서 짜놓은 일정에 따라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나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아침을 먹고, 오전에는 어디를 가야 하며 점심은 또 누구와 오후에는 또 다른 일정이 다 준비되어 있다. 여기저기 짜놓은 일정에 따라 돌아다니다가 보면 저녁이고, 피곤해서 숙소에 드는 일정, 마치 시지포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같은 그런 생활을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선거를 치르며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이 자기 몸을 낮추고, 당선이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목에 힘주는 생활, 그러다가 선거에 떨어지면 감옥에도 가고,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오매불망 다시 선거판에 뛰어드는 부나비 같은 삶, 그게 바로 오늘날 현대판 벼슬아치들의 삶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부 학자와 관리까지 포함)과 자기를 온전하게 사는 한가한 사람 중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절묘하게 묘사한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였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기쁨과 유희에 빠져 있다.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돈의 유혹에 빠지거나 명성 좇기에 바빠서 명상적인 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이득과 즐거움을 찾는 일이 본래 자신의 본분인 것처럼 여기고 명상적이거나 한가한 일을 외면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쁘지 않고 한가한 것을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가롭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귀한 것이다. 그것은 악덕惡德이기는커녕 오히려 미덕美德이다. 한가한 인간이 바쁜 인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비단 학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업가나 직장인들도 모두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그들은 24시간도 모자라는 듯 시간을 잘게 나누어 조금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쓰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어떻게 시간의 적절한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생의 목적이 명성의 획득이나 돈다발을 긁어모으는 일이라고 믿는 자들이라면, 자기 인생을 얼마나 낭비했는지 죽는 순간에나 깨닫고 후회할 것이다. 그렇게 목표달성을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들이 수첩에 적어 놓은 일정이란 모두가 그가 속해 있는 거대한 조직의 틀 속에 맞추어진 것들이지, 자신을 위해 할애된 시간은 거의 없다.

거기에는 ‘나만을 위한 명상 시간’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의 대화’ 따위는 들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은행가나 사업가들은 마치 돌덩이가 길바닥에 끝없이 굴러다니듯, 이 사회의 거대한 조직이나 기구의 타성에 따라 무심히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와 조직을 위해 살 뿐이다. 지금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꿀벌이나 개미처럼 법석을 떨면서 살고 있다. 그 소란이 너무 심해서 문화는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그들의 문화는 침착성의 결핍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야만적인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처럼 이기적이고 모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모든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인과 노예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가족이나 친구가 보고 싶어도 너무 바빠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노예이지, 어떻게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바쁜 족속들이 존경받는 시대도 없었다. 바쁜 것을 큰 자랑이나 벼슬처럼 여기는 시대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바쁜 사람들이 경멸하는 한가한 사람들이다. 몸과 마음이 변함없이 침착한 사람들은 좋은 기질을 갖추고 있어서 유익한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한가한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이미 불행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 실린 글이다.

사진 신정일

물론 나는 통장이나 이장은커녕 어떤 사회적 직책을 받지 않은 삶을 살았고, 1978년 2월 마지막 병장 월급 2400원 외에 제대로 된 월급 한번 받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그런 직책들이 얼마나 좋은 지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한 번밖에 안 사는 삶, 자신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자유롭고, 떳떳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난 이상 자기의 삶을 가장 온전하게 사는 것, 그런데, 선출직 공무원이나 직장에 매어 사는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바대로 자유인이 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노에처럼 사는 것이다. 오랫동안 막역莫逆하게 지낸 송하진 전 전북지사가 현직에 있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나는 노예”라며 자조하였다.

그 뒤 전북지사를 내려놓은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신정일 선생, 나 이제 자유인이 되었어.” 내가 이렇게 답했다. “이제 자유인으로 이모작을 잘 해야 합니다.” “알았어.” 그 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 한글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끔씩 산천 유람에도 나서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변신인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새롭게 부활했으니…

한번밖에 못 사는 삶, 욕심을 버리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치열하되 좀더 한가하게 사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이다.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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