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 가정서 자란 니체
독일 작센주 뢰켄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분위기가 풍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특히 그의 부친은 왕의 세 공주를 가르치는 교사를 했던 유능한 목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친이 사고로 니체가 다섯 살 때 별세함으로써 외가로 옮겨 살아야했다. 니체는 뛰어난 머리와 예민한 감수성으로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기가 막히게 암송함으로써 ‘꼬마 목사’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독실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랬던 그가 명문고교에 들어가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한다. 독일어 작문과 음악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면서도 학교의 딱딱한 분위기와 낡은 도덕을 비웃는 반항아적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은 학생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보고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진지하지 못한 보고서를 제출해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감금과 함께 외출금지를 당하는 벌칙을 받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계속 빗나가게 된다.
신학 공부 중도하차 철학도 변신
결국 목사가 되라는 모친의 권유대로 신학대학에 진학하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성적도 불량하게 되자 기독교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마침 현대 윤리신학의 아버지로 불린 알브레히트 벤야민 리츨 교수의 권유로 그를 따라 라이프치히대로 전학해 문헌학과로 전공을 바꿔 이에 매진한다. 이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탐독하고 그의 광팬이 되면서 철학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리츨 교수의 총애를 받아 박사학위도 없이 스위스 바젤대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때 리츨 교수의 추천사가 걸작이다. “오랜 세월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의 성장을 지켜보았지만, 니체처럼 젊은 나이에 빨리 성숙한 청년을 본 적이 없다. 니체는 천재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이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5세 되던 해에 그는 라이프치히대에서 이미 써놓은 논문 <디오게네스 레어티루스>를 근거로 소급하여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자격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얻은 각종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27세에 병가를 얻었는데, 그 와중에도 한 달반만에 <비극의 탄생>을 써서 출간했다. 문제는 이 책이 기독교를 심하게 비방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음악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등 몇몇 절친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으나 학계로부터는 총체적인 혹평을 받아 반감에 봉착했다. 학생들마저 그를 외면해 이듬해 겨울 학기에는 단 한 명의 수강생만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비극의 탄생>을 극찬했던 바그너마저 1876년 새로 막을 올린 오페라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추앙하면서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 격분해 “너도 십자가와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통탄하며 그와 의절해버린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극심한 두통과 안통, 우울증과 대인기피 등으로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각각 10여 일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 3부를 완성했다. 이 역시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창시로 알려진 차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해 기독교와는 거리감이 큰 저작으로 꼽힌다.
“교회와 사제들이 신을 죽였다”
니체는 예수가 신앙적인 삶을 중시하지 않고 평화, 적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강조한 것으로 이해했다. 또 예수가 말하는 구원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결국 예수가 말하는 천국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깃든 평화로운 마음 상태를 말하고, 그 실천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마음의 천국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이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체는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교회를 위협하는 예수를 못 박아 죽였지만, 기독교 역시 율법학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예수의 죽음 이후 중세와 근세까지 교회와 사제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천국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유일신과 독생자인 예수를 가르침으로써 사랑을 통한 구원 대신 불멸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통한 구원, 부활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교리만을 가르쳤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결국 니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교회와 사제들이 신을 죽였다고 단정했다.
앞서 지적했듯 키르케고르와 니체 모두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며, 합리적이고 관념적인 철학과 철학의 조직적인 구조를 비판했다. 두 철학자 모두 기독교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중요한 부분으로 계속 남아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믿었고, 신앙은 기독교 국가의 안정적이며 사회적인 모임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포와 기쁨으로 충만한 좀 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니체는 기독교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약함을 보충하려고 기독교에 들러붙는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기독교 자체가 퇴폐적인 종교라고 보았다. 이것이 두 실존주의 선구자의 큰 차이라 하겠다.
[참조] 강성률 著 푸른솔 刊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김선욱 著 자음과모음 刊 <죽음에 이르는 병 이야기>
수 프리도 著 박선영 譯 빙 刊 <니체의 삶>
도널드 파머 著 정연은 譯 <키르케고르 실존극장>
존 D. 카푸토 著 임규정 譯 웅진지식하우스 刊
헨리 해블록 엘리스 著 최선임 譯 지식여행 刊 <니체의 긍정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