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시선] “세밑 문득 그리워 가만히 불러보는 어머니!”

문득 그리워 가만히 불러보는 우리 어머니! 사진은 신정일 작가 모친 정병례 여사. 1927~2013년 이땅에 살다 가셨다.

어머니 기일에 떠올리는 대운이고개의 추억

그새 오래 전 이야기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진안 백운에 갔을 때의 일이니까, 그로부터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때 그 순간과 지금은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마음이 슬픔인지 회한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날의 그 추억은 너무도 선명한데,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는 것, 그러나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리라.

문득 그리워 가만히 불러보는 우리 어머니!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의 소재지 백암리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에게 임실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동창을 지나 구신리를 거쳐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 같은 고개인 대운이재를 맨 처음 한발 한발 걸어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그 무렵 우리 집안의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 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6~7년 전부터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임실군 성수면과 관촌면 일대,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다니며 옷가지를 파는 행상을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옷가지를 팔고 받아온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 팔고는 했다. 그 이유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임실장에 가던 길가 마을인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맡겨놓은 곡식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까지 17km를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것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너댓 말을 무겁게 등에다 지고 40리 넘는 길을 간다. 어쩔 도리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저리 보채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하고 누워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 나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

5일이 장이라서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아버지는 아직도 깊은 한밤 중이고, 동생들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날 수밖에 없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둥 마는둥 하고 너 말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 서너 살 짜리 소년이 너댓 말쯤의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길 위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옛 시절 창(倉)고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의 최상류에 놓인 백운교를 건너 덕현리 원덕현 마을에 이른다. 그곳에서 숲이 울창한 구신이재를 넘어갈 때면 불쑥 도깨비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닿는다. 어머니가 맡겨둔 곡식을 조금 더 찾아서 마을 뒤편으로 이어진 길을 가다가 보면 다시 대운이고개에 이른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 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 마을 사이에 자리잡은 대운이재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을 더 되게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다. 나도 힘들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언제 쯤이면 이처럼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을까? 도무지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고개 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 마을에 닿는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 마을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서 개들이 울어댄다. 대운 아랫 자락에 있는 매마우마을을 지나 수철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 쯤에서 보리개떡을 내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당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사는 것이 힘이 들고 무엇보다 머리에 이고 가는 곡식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설움이 북바쳐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 왔다”고 했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수철리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뿌연 하게 밝아 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 뒤를 따라 장을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서 갈마리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나의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있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 찬연한 슬픔으로 다가오던 그 햇살은 얼마나 나를 주눅들게 하였던지?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 찬연한 슬픔으로 다가오던 그 햇살은 얼마나 나를 주눅들게 하였던지?(중략) “글자마다 눈물 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하략) 사진은 신정일 작가 모친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서 자판으로 그 추억을 두드릴 때 담헌 홍대용이 친구가 죽자 지은 제문祭文 한 구절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글자마다 눈물 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서 그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넘었던 그 고개에 대한 추억을 망각처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점이 풀릴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토록 아프고 쓰린 추억은 세월의 흐름 속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서 가슴을 들쑤시며 일어난다는 것을 그날 임실 17km라고 쓰여진 이정표를 보며 깨달았다.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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