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혁의 造船삼국지] ‘홍콩인’ 피터 이야기

아시아엔은 오는 11월11일 창간 3돌을 맞습니다. 그동안 독자들께서 보내주신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시아엔은 창간 1년만에 네이버와 검색제휴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제휴 이전 기사는 검색되지 않고 있어, 그 이전 발행된 아시아엔 콘텐츠 가운데 일부를 다시 내기로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좋은 정보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편집자>

내가 근무했던 직장의 홍콩지점에 피터라는 홍콩인 직원이 있었다. 나는 그의 성을 모른다. 그는 누구에게나 피터라고 불리웠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공식 직책은 지점장 승용차의 운전기사였다. 그는 손님이 오면 그 승용차로 회사의 손님들을 모셨고, 지점장이 차를 쓰지 않는 동안 그 차로 문서전달도 맡고 있었다. 밖에서 할 일이 없으면 사무실에 앉아 전화도 받고 문서수발도 하면서, 사무실의 자질구레한 일도 찾아서 해내어, 사무실에서 자신을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홍콩은 상반된 복잡한 삶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신공항이 생기기 전 카이탁 공항을 거쳐 홍콩섬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길에는 서민들이 사는 큰 아파트 동네가 있었다. 해풍에 찌들은, 퇴색해서 검게 변한 벽은 새로 페인트 칠하지 않은 채 수십년 동안 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 덥고 습기 찬 곳에서 냉방장치를 설치할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일년 내내 창문을 열고 사는 동네였다. 그런가 하면, 홍콩섬의 산 비탈은 세상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세계적 부의 상징같은 호화주택들로 채워져 있었다. 찌든 배 위에서 일생을 보내는 선상부락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가 하면, 그 곁으로 눈부신 물살을 가르며 초호화 요트가 쾌주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한마디 하지 않고 그들만의 중국어 사투리로 살아가는가 하면, 일년 열두 달 영어로 직장을 다니며 영어만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잘 만들어진, 도시를 관통하는 고가 인도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남녀 어린아이들이 끌어 안고 애무하고 담배 피우며 거리낌 없이 그들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가 하면, 그 옆으로 하루 일과에 쫓기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나가고 있었고, 길에 퍼질러 앉은 나이든 사람들의 한가한 삶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절묘한 것은 그 상반된 삶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제 모양대로 살면서 조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었다.

피터는 전형적인 남부 중국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몸이 가냘펐고, 주름이 많은 얼굴은 그을린 색깔이었다. 그는 영어를 잘 이해하고 영어로 소통하는데 불편이 없었지만 그의 영어에는 남부 중국인들의 어조가 진하게 스며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는 홍콩의 두 모습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중국인 특유의 체념적인 표정을 갖고 있었다. 결코 거역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철저한 영국적인 준법정신은 때로는 그의 처신에 도무지 융통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모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홍콩과 구룡반도 사이의 해저 터널로 들어섰다. 왕복 각각 2차선이었다. 차는 2차선으로 가고 있었다. 왼쪽 1차선은 수월하게 움직이는데 사고가 났는지 우리 차선은 꼼짝하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이 빠듯했던 나는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는 예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중 황색 실선 (Double Yellow Solid Line)인 걸요.” 어떤 일도 거부한 적이 없던 그의 명확한 거절이었다. ‘거 왼쪽으로는 차들도 적은데 좀 들어가도 되잖아’ 라고 역정을 낼 생각이었으나, 그의 부드럽지만 확고한 얼굴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히 그의 준법정신에 맞설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공항에 늦지 않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고, 사실 별로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작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것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떠날 때 나는 호주머니에 남아 있던 홍콩 돈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곤 했다. 돈이 많건 작건 그는 호들갑 떨지 않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받았다.

언젠가 홍콩 출장 길에 나는 그의 책상 위에 요리강습서가 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형편이 되면 간단한 음식점을 차려 볼까 하구요” 하며 책을 덮던 것이었다. 그리고, 90년대초 중국이 홍콩을 접수했을 때, 불평 한마디 없이 그는 조용히 캐나다로 떠났다. 싫은 사람들의 불편한 간섭 받지 않고,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었다.

세상 다니며, 법 지키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목소리 크기로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세태를 볼 때마다, 나는 피터를 생각하고, 피터로 대표되는 홍콩이라는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법부터 지키고,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의 삶을 관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말없이 노력하는 그런 사람과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아시아가, 특히 홍콩의 경제가 아주 어려운 요즈음, 피터를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하고 살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 입에는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머무른다. 캐나다의 어느 조그만 도시의 조용한 거리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만 중국음식점을 차려 놓고, 곰지락거리며 하루하루를 그의 분복에 맞게, 행복하게 살아 가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피터는 내게 진정한 세계인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