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단둥과 항미원조 기념관

단둥은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 하류를 건너 만주로 나가는 길목에 있으며?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옛 이름은 안동이다. 그것은 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노골적으로 한반도를 노려보고 있다는 의사를 담고 있다. 그래서 북한정권이 들어서면서 단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압록강 단교

단둥을 생각하면 먼저 압록강 대교를 떠올리게 된다. 1906년 일제가 경의선을 개통하고 철도를 심양까지 연결하면서 건설된 이 철교는 6. 25사변 당시 B-29폭격기의 폭격을 받아 2개의 다리 중 하나는 파괴되었다. 파괴된 좌측의 압록강단교(鴨綠江端橋)는 중국 쪽의 일부 교각만 남아있고 북한방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압록강 단교를 알리는 비석

온전한 다리는 지금도 단둥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길이 946m의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로서 열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있다. 압록강 단교는 폭격의 충격으로 엿가락처럼 휘어진 강철구조물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폭격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모조품까지 진열해놓고 있다.

한복을 빌려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

중국은 단교를 보수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안보교육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람선은 압록강단교와 북한 지역의 항구와 선박, 사람들을 구경하고 북한의 선전 구호들이 있는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의 관광 유람선을 타고 동물원 구경하듯이 북한 지역을 돌아보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북한의 현실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북한의 신의주 강변 풍경
금강산공원의 금강정 앞 광장의 아침

두 번째 금강산공원은 1905년에 조성된 91㎢의 공원으로서 단둥 시의 북서쪽에 있다. 이곳에는 일제치하에 건설된 일본인의 주거지와 군사시설, 그리고 만주국 황제 부의의 순례비가 있었다. 이곳은 경사가 완만하며 산 정상의 금강정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차량으로 쉽게 오를 수도 있으나 지금은 인근 지역 주민들의 아침 산책과 운동장소로 개방되어 배드민턴이나 맨손체조?태극권 수련 등 운동을 하는 주민들로 가득 차 있다. 정상은 6.25사변 때에 중국군의 포대가 설치된 곳이지만 지금은 금강정이라는 정자와 광장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이 신의주를 바라보는 장소와 주민들의 운동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항미원조 기념탑

세 번째는 압록강과 건너편 북한의 신의주가 내려다보이는 영화산(英華山)에 있는 중국인들이 6. 25전쟁을 일컫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탑과 기념관이다. 기념탑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1953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53m의 높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항미원조 기념관

기념관은 1958년 건립되어 정전협정 40주년이었던 1993년 7월 27일 확장공사를 마치고 준공기념식을 했다. 그때 기념식을 주관한 사람이 당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후진타오 현 국가 주석이다. 기념관의 전시물은 상당히 오래된 듯 퇴색한 것들도 많았지만 각 층에 나누어 전시된 지휘관들의 초상사진과 중국 정치인들의 휘호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6·25동란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항미원조 기념탑에 전시된 참전지휘관들의 초상

그리고 기념탑 건너편에 새롭게 건설된 기념관은 현대적인 전시의 개념을 도입하여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들도 많았으며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보낸 친필 서한도 공개하고 있다.

“용감하고 씩씩하게 압록강을 넘어서…중국의 아들딸들아 마음을 모아…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자… 욕심 많은 늑대, 욕심 많은 늑대, 미국을 쳐부수자.”

1950년 10월 25일 수많은 중국 병사들이 그런 노래를 부르며 압록강을 건넜다. 강은 이미 얼어 있었고 흰 눈까지 덮여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간 이들 가운데 14만 명이 한반도 곳곳에서 죽었다.

그때로부터 55년, 중국의 ‘항미원조 기념관’ 홈페이지에는 곽말약(郭末若)이 쓴 ‘항미원조(伉美援朝)’라는 붓글씨 아래로 이런 글귀가 애플릿으로 흐른다. “그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 어느 날 압록강 변에 전쟁의 불길이 와 닿았네… 젊은이들은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갔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을… 무정한 전쟁은 그들을 쓰러트렸네….”

이는 미국 워싱턴 한국전 참전영웅 기념비에 있는 글귀와 비슷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따랐던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은….”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와서 죽어야 했던 미국 젊은이들의 숫자는 5만 4000명이었다.

6·25전쟁의 승리를 기념한다는 이붕 전 중국총리의 휘호

중국인들에게 항미원조는 잊힌 전쟁이 아니다. 중국인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북한 땅 곳곳에 남아있다. 평양 모란봉 기슭에는 참전 중국군 명단이 보관된?’조중우의탑(朝中友誼?)’이 세워져 있으며 개성에는 중국군 1만여 명의 유골이 묻혀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이 있다. 북한 쪽 강원도 평강군과 법동군에도 열사 묘가 있다.?법동군의 것은 2004년 10월 중국군 병사 225명의 유골을 이장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중국과 북한 지도자들은 수시로 이곳들을 방문해서 전쟁의 기억을 되살린다. 북한 핵 문제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2005년 7월 후진타오 주석의 구두 메시지를 갖고 평양을 찾아갔던 탕자쉬안 국무위원은 그 바쁜 가운데서도 모란봉의 조중우의탑을 찾아가 헌화했다. 2001년 9월 북한을 공식방문했던 장쩌민 국가주석도 우의탑에 가서 헌화했다.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도 1993년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참석한 뒤 평양으로 건너가 조중우의탑을 참배했다.

전쟁의 기억은 중국과 북한의 사이에는 그처럼 선명하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와 미국 사이는 반미주의자들 때문에 전쟁의 기억을 놓고도 틈이 벌어지고 있다. 반미(反美)라는 재주를 한국 사람들이 부려봐야 결국 이득은 중국에 돌아간다는 것이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중국전문가 로버트 셔터 교수의 말은 우리가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씹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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