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대구청년 김학봉⑩]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장희의 삶에 비추다

1930년대 대구의 자본가 자제들은
식민지의 내막과 참상을 잘 모릅니다.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지요.
총독부 관제언론의 보도에만 익숙해 있었고
세상 돌아가는 구체적 사정에도 무관심했을 테지요.
삼남지방 농민들이 농토와 재산을 잃고
알거지가 되어 가족들과 유랑민 행색으로
울면서 삭풍을 헤치며 만주로 떠나던 때
이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빚어낸 빈곤과 수탈을 모르고
설사 알았다 할지라도 외면했을 터입니다.
사진 속의 청년들은 겸손과 절제를 잃었습니다.
청년기의 오만한 치기가 행동과 표정에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권련을 손가락에 끼운 채로
잔뜩 여유로운 얼굴과 자세로 엎드렸네요.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빗어 넘겼고
양복 정장차림으로 잔디밭에서 망중한을 즐깁니다.
그들의 손가락에 낀 담배는 고급 권련
하도, 가이다, 아사히 등으로 짐작이 됩니다.
장소는 자신의 집 정원으로 추정이 되네요.
이육사 시인이나 작가 심훈 등이 남긴 사진과는
엄청난 품격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지주 자본가의 자제들에게 역사의식이나
현실의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고월 이장희 시인은 골수 친일파였던
부친 이병학을 증오하고 담을 쌓았지요.
결국은 죽음으로 삶을 완결하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들은 해방 후 대구경북 지역의
스포츠계를 이끈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