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대구청년 김학봉⑪] 유도선수 양성과 이웃사랑 100세 삶

대구 경북지역의 걸출한 유도선수가 새로 배출되는 배경에는 늘 김학봉 선생의 특별 지원과 배려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1930년대 후반 김학봉과 유도 동료들

오늘은 1930년대의 대구 청년
김학봉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식민지시대의 청년기를 멋지게 구가하던
김학봉 사진들을 기억하시지요?
선생은 대구 마당발이었습니다.

걸출한 가요황제 남인수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가야산 해인사를
함께 안내하며 다녀오던 일,
시인이자 화가였던 나혜석도 그렇게
김학봉 선생 안내를 받아 명승지를 다녀왔지요.
그게 사진 기록으로 다 남아 있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 유도선수들은 김학봉 선생의 후원으로 국제대회 수상을 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나왔다. 지금도 우송 선생을 아버지처럼 여긴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1930년대 후반 대구지역 유도선수들

당시 대구 청년들과 어울려
동촌 금호강도 쏘다니고 팔공산 등산도 즐기고
한 겨울 눈밭을 뒹굴기도 했었지요.
김학봉 선생의 아호는 우송(愚松)입니다.
우직한 소나무답게 선생의 삶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만년을 보내셨네요.

살아생전 주로 하신 일이
불우아동을 위한 장학생활 지원
아동복지시설 지원, 독거노인 및 장애복지시설 지원,
중증질환자 치료비 지원, 다문화가족 지원 등
참으로 빛나는 이웃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런 사업의 실행을 위해 사비 20억을 내셨지요.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우송재단 이름으로
우송 김학봉 선생의 뜻을 길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 청년의 갸륵한 정신이 잘 갈무리 되어
식민지와 전쟁, 분단의 격동을 거치면서도
선생의 정신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네요.
우송 선생은 스포츠 중 유도를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대구 경북지역의 걸출한 유도선수가
새로 배출되는 배경에는 늘 김학봉 선생의
특별 지원과 배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지금도 우송 선생을 아버지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김학봉 선생은 100살까지 사셨습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