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대구청년 김학봉③] 농구화 신고 팔공산 등산

경남 성주에서 태어난 김학봉(1925~2014)은 1973년 경남 김해에 타일업체인 한영요업을 설립하고 1980년대 모자이크 타일의 대형화를 주도했다. 1986년 자신의 호를 딴 우송장학회를 설립해 대구·경북지역 유도 특기생들을 지원했으며 2003년 50억원을 출연해 우송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유도 9단인 김 회장은 경북유도회장, 대구시의원,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1937년 20대 초반 시절의 김학봉의 사진 등을 통해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문물을 이동순 시인의 해설로 몇 차례 소개한다. <편집자>
여기 흥미로운 사진이 있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조선의 청년들도
이따금 등산을 즐겼음을 보여주고 있네요.
지금 그들이 어디에 서 있느냐 하면
대구 동구 도학동 팔공산 일주문 앞입니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이란 현판이 보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우스개가 있지요.
한 허풍쟁이가 이 현판 앞에 이르러
한자를 읽지 못하면 그냥 지나쳐야 할 텐데
잔뜩 뽐을 내며 사람들 앞에 자신을 과시합니다.
“입공산 동화사 풍풍문이라”,
“거참 글씨 한번 잘 썼구나” 라고 뻐겼다네요.
여덟 팔(八)을 들 입(入)으로 읽었고,
봉황(鳳凰)이 어려운 한자이니 대충 짐작으로
‘바람 풍(風)이겠지’ 하면서 얼렁뚱땅 읽었네요.
식민지시대 후반 대구 청년들 셋이
팔공산 등산길에 나섰는데 복장이 흥미롭습니다.
어디 머리부터 차근차근 볼까요.
평소 쓰던 중절모나 가벼운 모자를 썼군요.
상의는 헐렁한 남방셔츠로 보이는데
순면 제품이라 땀을 흥건히 적셨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긴 팔을 절반쯤 걷어올려 입었네요.
어깨에 대각선으로 찬 것은 물병입니다.
하의는 모두 풍덩한 반바지를 착용하고 있네요.
등산화는 따로 개발된 것이 없던 시절이라
복사뼈까지 올라오는 농구화를 신었습니다.
청년 셋이 모두 지팡이를 들었군요.
허리춤엔 하얀 땀닦이 수건을 꽂았습니다.
등에는 륙색을 짊어졌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들여온 고급으로 보입니다.
륙색을 ‘니꾸사꾸’란 일본식 발음으로 읽었지요.
셋 중에 김학봉 청년은 중간에 섰습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환하고 밝아 보이네요.
대개 식민지 청년들이 길에서도 체포되어
지원병으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는데
그들은 유력자 집안이라 안전했나 봅니다.
이로부터 85년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의 등산복 차림은 몹시 고급스럽습니다.
가격도 비싸고 고가의 수입품이 많습니다.
등산화도 비브람, 고어텍스만 상대하지요.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