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축구선수 정대세의 눈물

2010년 북한 축구선수 정대세 브라질전서 눈물

2010년 6월1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참가한 북한 축구대표팀 소속 정대세 선수가 조별 예선 G조 1차전 브라질과 북한의 경기 직전 뜨거운 눈물을 흘려 지구촌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2010년 월드컵 축구경기 북한과 브라질전 경기 시작 직전 북한 국가가 울려퍼지자 다큰 청년 정대세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 기뻐서 운다고 했다. 이 장면을 본 남북한 사람들도 대부분 따라 울었다.

삭발을 한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3세 정대세 선수는 경기에 앞서 북한의 국가가 울려퍼지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울었냐”고 물으니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오게 돼 감격스럽고, 세계 최강 팀과 맞붙게 돼 좋아서 울었다”고 대답했다.

정대세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로 당시 일본 가와사키 프론탈레 클럽 소속으로 J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2012년 6월 현재 FC 쾰른 소속 포워드로 활약하고 있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북한 대표선수로 월드컵에 출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조총련계 학교를 다니며 정서적으로 북한에 더 친숙함을 느꼈기 때문.

탄탄한 체격에 저돌적인 돌파와 망설임 없는 슈팅이 잉글랜드 선수 웨인 루니와 닮았다 해서 ‘인민 루니’로 불렸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북한 사람들은 물론 남한 사람들도 거의 예외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누구도 이런 눈물의 원인을 정확히 표현할 길은 없었지만, 분단된 나라에 사는 같은 민족으로서 느끼는 회한 같은 것이었다. 누가 이 눈물, 이 집단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진단하고 처방할 것인가.



2002년 미 의회, 전화기 발명자 메우치로 인정

2002년 6월16일 미국 의회는 전화기의 발명자는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1808~1889)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 하원은 이날 메우치가 1860년 뉴욕에서 시연한 ‘텔레트로포노’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항간에 최초 발명자로 알려진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 특허를 획득했다는 점을 표결을 통해 확정했다.

그 동안 역사학자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미국 정부 등을 상대로 메우치가 전화기 발명자임을 설득해왔다.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메우치는 미국 뉴욕 부근의 스태튼 섬으로 이주한 뒤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좀 더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 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에 1년짜리 특허를 신청했지만 3년 뒤 특허를 갱신하지 못했다. 1876년에 그와 연구소를 함께 사용했던 벨이 전화기 특허를 내고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해 큰 돈을 벌자 그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대법원이 벨의 사기혐의를 인정, 승리를 눈앞에 뒀으나 1889년 그가 숨지자 재판도 중단됐다.

1977년 한국 출신 물리학자 이휘소 의문사

1977년 6월16일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휘소가 미국 콜로라도 주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열린 초청강연에 참석차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를 당해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휘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제조책임자였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페르미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로 극찬한 한국 출신의 물리학자였다. 주로 소립자물리학의 쿼크와 참 이론, 약작용과 전기장·자기장 작용을 통합하는 게이지통일장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동했다. 사고 당시 이휘소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과 더불어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독자개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도 나돌아 의문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1976년 남아공 소웨토 봉기

1976년 6월16일 수요일 아침 백인 집권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교육부는 “모든 과목을 아프리칸즈(남아공 보어인의 언어)로 가르치겠다”고 법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소웨토 소재 초중고교 학생들은 이에 반발, 올란도 웨스트(Orlando West)에 모여 평화로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아프리칸즈 집어쳐라(Down with Afrikaans)”, “반투 교육 꺼져라(To Hell with Bantu Education)” 등의 피켓을 들고 소풍이라도 온 듯 웃고 떠들며 행진하던 어린 학생들에게 발포가 시작된 것은 오전 9시.

총탄에 맞아 쓰러진 13살 헥터의 시신을 누이 앙또아넷(Antoinette)과 18살 음뷰사(Mbuyisa Makhuba)가 울부짖으며 들고 가는 모습이 사진기자 샘(Sam Nzima)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남아프리카 민중의 쌓이고 쌓인 울분과 설움을 폭발시켜 18년간 지속된 가열찬 투쟁과 94년 민주 쟁취의 대장정을 이끌어낸 도화선이 됐다.

‘소웨토 봉기’는 일주일 사이 176명의 학생 사망자를 내며 이후 15개월 동안 남아프리카 전역 200여개 타운과 도시로 확산됐다.

헥터가 사망한지 29년이 지난 2005년, 그가 쓰러졌던 장소엔 벽돌로 아담하게 지은 ‘헥터 피터슨 박물관(Hector Pieterson Museum)’이 서 있다. 박물관 광장은 ‘소웨토 봉기’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을 기념하는 돌기둥들로 둘러싸이고, 이들의 사라진 삶과 이야기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광장 중앙은 텅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광장 좌측에는 헥터의 그 유명한 사진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투쟁에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을 기리며(To honor the youth who gave their lives in the struggle for freedom and democracy)”라는 만델라의 헌사가 적힌 추모비가 서 있고, 그 앞에는 봉기 당시 경찰의 발포선을 알려주기 위해 심어진 나무들이 빌라카지 거리까지 일렬로 나 있다.

1963년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탄생

1963년 6월16일 소련 바이코니르에서 세계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슈코바가 탑승한 보스토크 6호가 발사됐다. 보스트크 6호는 71시간 동안 지구를 48회 선회한 뒤 6월19일 지상에 착륙했다.

테레슈코바는 야로슬라블에 있는 타이어 공장과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그녀는 조종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취미로 낙하산을 탔었기 때문에 1961년 우주비행사 계획에 선발됐었다. 테레슈코바는 같은 해 11월3일 우주비행사인 A.G.니콜라예프와 결혼했다. 1962년 소련 최고회의의 현역 의원, 1968년 소련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그녀는 레닌 훈장을 2회 받기도 했다.

한편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가 탄생한 날로부터 꼭 49년 뒤인 2012년 6월16일 중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류양(34)이 유인우주선 ‘센저우 9호’를 타고 우주로 날아올랐다. 6월16일과 여성 우주인, 우연치고는 절묘한 인연이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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