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2주년···100세 이원희 할머니의 기억 속 ‘그때 그 순간들’

이원희 할머니 가족사진, 증손자까지 4대가 모였다.


돌나라 한농 효도마을 100세 이원희 할머니 “모든 것에 감사하세요”

[아시아엔=엄정례 자유기고가] 그제 6월 27일은 한국전쟁 발발 72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28살이던 올해 100세인 할머니께 6.25전쟁 얘기를 여쭸다. 돌나라 한농복구회가 운영하는 경북 문경시 농암면 효도마을에 사는 이원희 할머니는 전쟁 직후 피란 가던 얘기로 시작했다.

“서울에서 첫딸 백일잔치를 하고 있는데 6.25전쟁이 터졌어. 신랑이 사준 그 좋은 이불, 그릇, 금비녀, 금시계, 다이아반지 챙길 겨를이 없어 다 놓고 쌀만 좀 챙겨서 피난 왔어. 밤새도록 걸어서 장충단고개 꼭대기까지 갔는데 거기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니 전기가 끊겨서 캄캄했어. 여기저기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장충단고개 밑 헛간에서 잤어. 죽을 쑤라고 해서 보니 솥도 시커멓고 찌그러지고…. 솥에 쌀을 넣고 죽을 쑤었는데 벌벌 떨려서 못 먹었어.”

이원희 할머니

일제 강점 10여년이 지난 1922년 청주시 남이면에서 태어나 스물셋에 해방을 맞고 1940년 열여덟 나이에 종갓집으로 시집 와 대들보 역할을 해온 이원희 할머니는 지금도 6월만 되면 그때 생각으로 몸서리를 친다고 했다. 계속되는 할머니의 기억이다. “한강변 뚝섬에 서있는데 기동차가 오더니 갑자기 펑 하고 대포가 떨어지데. 청주가 고향인데 한강다리는 끊어지고 배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배에 탔어. 보따리를 등에 메고 그 위에 4살쯤 되는 애를 얹고 가는 아버지가 강에 빠져 허우적대다 결국 떠내려갔는데 간신히 애만 건졌지. 애 엄마가 통곡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

이원희 할머니는 어제 일처럼 기억을 되살려내신다. “밤에 걷고 아침 되면 보리밥 지어 소금 발라 먹었어. 밤낮 4일을 걸어서 수원에 오니까 기차가 있더라고. 그 기차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청주 근처 시골 고향집으로 피난을 갔어.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는데, 볼 것 못 볼 것 다 봤어. 풀밭에 소를 매 놓으면 이북 사람들이 와서 잡아먹는다 그러고, 또 아군들도 소를 잡아먹어요. 나는 그 고기고 뭐고 총소리만 나면 가슴이 벌렁벌렁 했어. 사람들이 우리 광에서도 자고, 헛간에서도 자고 그랬어. 자다가 쾅쾅 대포소리가 나면 산으로 올라가 대피소로 들어가 숨었어.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을 살았어. 평화가 오기만 기다렸지.”

“전쟁이 끝났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도토리 한 가마니씩 주워 묵을 쒀서 식구들 나눠 먹었어. 보릿고개 때는 풋보리를 볶아 먹이고. 방앗간에서 찧어 채로 까불러서 소금을 넣어 밥도 해먹고 그냥 먹기도 했는데 고소하고 달콤하고 맛있었어.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 뭐.”할머니는 “내 얘기도 들어주는 이가 다 있다”며 너무 고맙다고 하신다.

15년전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기억력은 여전히 또렷한 이원희 할머니가 옛날 일들을 기억해내고 있다.

돌나라 한농복구회 주민들 사이에서 ‘감사할머니’로 불리는 이원희 할머니와 이야기 도중 저녁밥이 들어왔는데 김밥, 메밀국수, 동치미 국물 등 단순했다. 할머니는 “어제 팥죽을 맛있게 먹었는데 오늘도 잘 먹었다”며 “요새 밥맛이 좋아서 그전보다 더 먹는다”며 빙그레 웃으신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할머니는 슬하에 4남1녀 5남매를 두었다. 15년 전 골반을 다쳐 걷지 못해 바깥 출입이 쉽지 않지만 치매도 없이 총명하고 기억력도 좋은 편이다.

시집살이는 어떠셨냐고 묻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18살에 맏며느리로 시집 왔는데 그때는 다 가난했어. 신랑은 일본 가 있고 5년 동안 시조부모, 시부모, 시동생, 시누 모두 7식구를 재봉질해서 옷 다 입혀 드렸어. 누에를 키웠는데 누에고치를 물에다 넣고 끓여 실을 뽑아내면 그 속에서 번데기가 나와. 그럼 그 번데기는 볶아 먹고 명주실은 베를 짰어. 동네 사람들이 큰일이 있을 때마다 명주실 가져오면 신랑이 사준 미싱으로 옷 만들어 주고 품삯도 받았어. 그 돈으로 소를 샀는데 소가 크면 팔아 논도 사고 부자가 됐어. 일꾼들 2~3명 데리고 살았는데 그 일꾼들 바지저고리도 다 해서 입혔어. 나는 혼자 안 살았어. 남자 하는 일, 농사일 다 해가면서 시동생, 시누이 시집 장가 다 보냈어. 집안 식구들이 나를 떠받들었어. 우리 시어머님은 버선 한 켤레도 못 만들고 오줌똥 안 싸고 101살에 돌아가셨어.”

어느 여름날 이쁜 한복 차림을 하고 카메라 앞에 앉은 이원희 할머니

할머니는 신혼 초 자신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난 신랑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신랑이 돌아오면 두드려 패려고 했는데 어느 날 밭 매는데 와서 등을 툭툭 두드리는 거야. ‘너무 수고가 많았어. 미안해, 미안해’ 하는 바람에 마음이 다 녹아버렸어. 남편이 무역을 했는데 잘될 때는 돈을 많이 벌었어. 부도나면 땅 팔고 사업 망해서 고생한 건 말도 못해. 내가 신랑보고 서울에 집 사 달랬더니 병원 원장이 살던 3층 빌딩 큰 집을 사줬어. 그 집에서 3년 살다가 첫딸을 낳았지.”

종갓집 맏며느리로 들어와 신혼 초 신랑도 없이 집안 식구들 건사하며, 전쟁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이원희 할머니, 그의 삶이 바로 이 땅의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100년을 하루 같이 살아내신 할머니의 삶은 위대함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comments

  1. 넘 훌륭하신 한국의 여인상을 읽었습니다. 모쪼록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2. 한동네 살면서 가끔 휠체어 타시고 지나다니시는
    모습 뵈었었는데 기사를 읽고나니 짠하네요
    백세가 넘도록 치매도 없으시고 총명하시네요.
    참혹한 전쟁을 천명으로 견디시고 능력도 있으셔서
    그 와중에도 재산을 불려서 시집식구를 다 건사하셨다니
    보통 똑똑한 어른이 아니시네요.
    이제 곧 좋은 새세상이 올테니 건강하시게 장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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