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칼럼] 북한 ‘사할린동포 통제’ 실패

일제에 의해 사할린의 탄광에 광부로 동원, 귀환치 못하고 사할린에 남아 조선인학교의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한 조선인의 모습. <사진=현실문화연구 제공>

옛 소련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해외거주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는 곳이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당시 45만여 명의 거주자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련 붕괴 후, 이들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또는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흩어져 거주하게 된다.

러시아에 있는 한민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멀리 떨어진 사할린이라는 섬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지고 살고 있다.

1905년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일본은 남부 사할린 섬 일부를 차지했고,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한국인들은 이곳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새로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대부분 후한 급료를 받았지만 광업, 어업, 임업 등의 분야에서 미숙련 노동자로 일했다. 1940년대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돼 왔다. 1945년 사할린 섬에 사는 한민족의 수는 2만5000여 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은 남부 사할린을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곧 28만여 명의 일본인 거주자들은 짐을 싸서 섬을 떠날 것을 명령받았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도 그들처럼 고향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이는 허락되지 않았다.

20년간 대부분의 사할린동포들은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소련에 귀화했지만 그들은 소련 국민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그들은 국적이 없는 사람으로 남아있길 선택했다.

1950년대 후반, 북한당국은 사할린동포 커뮤니티 잠입을 시도했다. 북한 외교관, 첩보원 등은 사할린동포들에게 북한 국민이 될 것을 열심히 설득했다. 북한정보당국은 노동당 조직을 비밀리에 개설하고 스파이 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 국민이 아닌 모든 한국인들에게 결과적으로 북한에 올 것을 제안했다.

북한의 관심은 일본의 성공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의 한인 커뮤니티는 1930~1940년대 일본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1940년대 후반, 평양 지지자들은 이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됐고 이들은 조총련을 설립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한민족의 3분의 2 가량은 조총련의 회원이 됐다.

그들은 일본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져 다르게 살도록 교육 받았다. 학교에는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고,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은행과?네트워크, 미디어가 있었다.

북한당국은 사할린에도 이 성공적인 사례를 적용하려 했지만 소련은 일본이 아니었다. 소련당국은 나라 안의 다른 나라를 용인하지 않았고, 1960년대 초기 사할린동포들은 충분히 소련의 선전을 통해 북한 외교관들이 말하는 이야기와 평양의 장밋빛 미래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물을 경험했다.

1976년 소련정부는 긴장완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사할린 동포들이 섬을 떠나 일본으로 떠날 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신청자 비율이 넘쳐나자 이는 곧?번복됐다.

그리고?이들의 불만족은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소련당국은 관계자에 대해 이례적으로 잔인하게 처리했다. 그들은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고향, 북한으로 보내졌다.

북한 여권을 가진 송환운동가 40여 명은 추방당했는데 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1900년대 한국 단체들은 북한정부와 모스코바에 있는 북한대사관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

결과적으로 사할린동포의 귀환운동은 효과적으로 억압됐다.?1990년대가 돼서야 그들은 본국인 남한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북한과는 관계없이 남한정부와 일본, 러시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번역 최선화 기자 sun@theasian.asia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theasian.asia/?p=1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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