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 동티모르 포르투갈로부터 완전 독립

1975년 동티모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5년 11월28일 인도네시아 동쪽 끝 순다 열도의 일부인 티모르섬의 동쪽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티모르섬은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강점된 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의해 동서로 분할됐다. 17세기 이래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네덜란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서티모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자동 편입됐고, 동티모르는 1974년 포르투갈이 민주화되면서 식민주의를 포기하자 1975년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455년만의 일이었다.
독립선언 직후 인도네시아가 쳐들어와 강제 점령, 1976년 5월 일방적으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그 후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과 유혈탄압이 계속됐다.

1991년 주도 딜리시에서 열린 독립요구 주민집회에서는 인도네시아군이 무차별 발포, 508명이 사살됐다. 또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학생들 대부분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렸다. 이 사건 이후 국제사회가 동티모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동티모르문제 아태국제회의’가 열려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국제적 감시기구 설립을 촉구하는 성명서가 채택됐다.

1995년에는 유엔의 중재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원하는 포르투갈 당국자간 회담이 열리기도 했으나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나고 독립투쟁은 계속돼 인도네시아군에 의한 인권 유린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호세 라모스 오르타는 1996년 동티모르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결과 1998년 7월 인도네시아의 외무장관이 동티모르의 자치권 부여안을 제시하게 됐고 8월에는 포르투갈이 동티모르의 자치협상 개시에 합의, 10월에 뉴욕에서 자치협상이 시작됐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9년 1월27일 동티모르의 독립가능성을 시사했다. 주민들에게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허용, 같은 해 8월30일 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주민의 78.5%가 독립을 찬성했고 21.5%가 반대했다. 이에 불복하는 인도네시아군과 이들이 훈련시킨 민병대는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방화를 자행, 인구의 3분의 1이 학살되고 주민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9월20일 다국적군 선발대 2500명이 동티모르에 도착, 치안 회복 활동에 들어가면서 학살을 주도했거나 뒤에서 연출한 민병대와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를 떠나고, 산속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돌아와 외면적인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독립을 반대한 동티모르인(대부분이 민병대)들이 서티모르 국경지대에 밀집해 있었다. 또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다국적군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고 있었다. 비정규전을 펼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2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지만 분쟁은 이어졌다.

실제로 2006년 잇단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유엔합동임무단(UNMIT)이 파견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2년 3월28일부터 치안권을 동티모르에 이양하기 시작했고 철수작업을 연말까지 끝낼 예정이다.
포르투갈 지배를 받은 동티모르가 이날 독립을 선언했다. 포르투갈 통치기간 동안, 동티모르는 자립기반을 갖지 못해 이듬해 인도네시아에 강제 편입됐다. 이후,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999년 UN 주도의 국민투표가 실시돼, 80% 지지로 독립을 다시 얻었다. 동티모르는 2002년 5월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히 분리 독립했다.

1820, 과학적사회주의 창시자 엥겔스 출생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Fridrich Engels)가 이날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포병연대에 복무하던 시기에는 베를린대학에서 청강했고, 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엥겔스는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과학적사회주의를 창시했으며 마르크스 사후, 그가 살아 있을 때 완성하지 못한 <자본론> 제2~6권 출판에 몰두하였다.

최선화 수습기자 sun@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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