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숙 열사 학술세미나] 윤치홍 “평생 가시밭길 걸으며 ‘초인적 항일’”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

윤치홍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 “달롱개도 빛난다 세상천지에”

[아시아엔=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 저는 윤형숙 열사가 1919년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 현장에서 왼팔 상단부를 잘린 지 꼭 20년 후인 1939년 3월 10일 화양면 창무리 열사의 생가 앞집에서 문중 조카로 태어났습니다. 7살에 해방을 맞고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다섯 살 위 삼촌과 두 살 아래 동생과 한 집에 살았습니다. 삼촌은 우리 형제들에게 유불(보료)을 둘러쓰고 그 속에서 독립유공자 윤자환과 의혈지사 윤형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밖에서는 항일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을 생활화했습니다.

그러다가 7살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불 속이 아닌 곳에서 “달롱개도 빛난다 세상천지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삼촌을 따라서 목이 터지도록 따라 불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해방 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생쥐야 생쥐야 잇빨 빠진 생쥐야 냇가에 가지마라 빙대(일본군인을 뜻함)한테 빰맞는다”는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울다가도 순사 온다 하면 뚝했고, 놋그릇을 공출로 저울에 달아서 공출로 빼앗아 가고 비행기 기름 짠다고 피마자를 재배하여 빼앗아가는 일본 관리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고 벌벌떨고만 서 있던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열사에 관한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번 주제발표를 통해 기독교 전도사로서의 활동이 상세히 검토돼 다행입니다. 열사는 1946년 여름 창무리 마을회관(당시 명칭 洞閣) 마루방(약 30평)에 교회를 세우고 5촌 조카 윤병채 씨를 전도사로 두고 운영했습니다. 열사는 여수에서 30리 길을 걸어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검정치마 하얀저고리를 입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고 설교하는 의혈지사 윤형숙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6.25전쟁 중 열사가 돌아가신 뒤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99년 전 3월, 한반도 전역에선 거대한 용암과도 같은 민족의 에너지가 분출됐다. 남쪽의 제주도에서 북쪽의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1500여 차례에 걸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은 비단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인구 2000만 명 중 연인원 200여만 명이 참여한 거족적인 대일 항쟁이었다. 일본 자료를 집계한 바로는 사망자 7500여 명, 부상자 1만6000여 명, 검거자가 4만69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추정). 기세(氣勢)에 놀란 일제는 무자비했다. 19세 소녀 윤형숙은 일본 경찰이 칼로 팔을 베자 다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쥐고 흔들었다.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간 유관순은 손톱과 발톱이 뽑히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국내외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倔起)’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상하이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이라는 소중한 열매가 맺혔다.(<동아일보> 보도 2018.3.3 “제국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라”, 1919~2019,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1> 밀명)

국민계몽으로 윤형숙 제2의 독립운동

의혈지사 윤형숙은 왼팔과 오른쪽 눈에 큰 부상을 입고 일제에 구금돼 있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자신과 조국이 처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여러 해를 고민한 끝에 문맹퇴치, 국민계몽 운동을 결심하고 식민치하에서 잠든 국민을 깨우는 일에 몸 바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육활동을 위해서는 교원자격증이 필요하여 광주에서 단기교원자격증 취득 후 고창야학, 고창교회 유치원 강사, 전주 한예정신학교 사감, 여수봉산학원 교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 일에 매진하는 열사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해방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열사는 7살 때 친척 윤성만의 남원 집에 기거한 후 윤씨 문중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시키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고향 여수에 와서 화양면 창무 친척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 보냈다. 윤병채, 윤상섭, 윤상옥, 박종윤 등이 그들이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하는데 국민의 생각은 갈수록 황패하고 오직 먹고 살아남기 위한 최악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열사는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잔악무도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통째로 먹고 행패를 부리고, 나라를 찾겠다는 애국지사들을 죽이고 가두는 일이 나날이 심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교육받지 못하는 국민을 위하여 한 팔과 한 눈으로 어른들은 야학으로, 유치원생에게는 유아교육을 시켰다. 국민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운동이라고 열사는 절감하고 있었다.

기록을 남기지 못한 윤 열사

윤형숙은 항일운동가면서 반공청년운동가로서 이승만과 이화장에서,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청와대에서 면담하곤 했다. 열사가 이승만과 친분이 있음을 알고 있는 북한 내무서원이 6·25 당시 남면 심포리에 피신한 열사를 피체하여 여수경찰서(당시 명칭 내무서)에 투옥했다. 결국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열 명씩 묶인 채 끌려 나가 총살당하였다.
(※이승만과 윤형숙의 인연: 윤형숙을 은성학원, 수피아여학교에서 수학하도록 주선해준 변요한 선교사는 이승만이 1905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할 때 추천서를 써주었음. 그 인연으로 변요한 선교사가 독립운동을 한 윤형숙을 애국동지로 이승만에게 소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됨.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경무대를 방문했음이 ‘독립운동가 윤형숙 의사 추모자료집’(2000.3.1) 8쪽에 기록돼 있음)

윤형숙 열사 묘소. 여수시 창무리 고향에 묻혀 후손들을 살펴보고 있는 열사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사진 이상기> 

인민군이 철수한 후 열사의 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위대한 열사의 행적은 인민군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다. 열사가 여수에서 살던 집(여수시 봉산동 산36번지, 약 50평 단독주택)은 인민군 점령 당시 임시본부로 사용되었다. 이는 인민군이 반공청년운동을 한 열사를 처단할 목적으로 침탈한 뒤 점유한 것이었다.

열사 사망 후 독립운동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2002년 10월 2일 국가기록원 서울사무소에서 판결문을 발급받아 2002년 12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판결문에 윤혈녀와 윤형숙이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여수시에서는 윤형숙 관련 자료를 집중 수집하여 사실관계 입증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충석 당시 여수시장의 의지와 확신에 찬 노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열사가 1935년 광주 양림동에서 취적한 호적과 부친 윤치운의 제적등본, 파평윤씨 족보, 김처녀·신순범·김충만 증언 등을 통해 혈녀와 형숙이 동일인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정부는 2004년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열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윤형숙은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윤치운의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어려서 생모와 사별하고 계모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뒤 7세 때 친척 윤성만(남원 동북교회 장로)과 변요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순천 은성학원을 수료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1919년 3월 10일 광주만세운동의 맨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도(日本軍刀)에 왼팔을 잘리고 피체되어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유폐(幽閉)되었다가 풀려났다. 열사는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의 엄혹한 감시 아래 문맹퇴치, 계몽운동을 계속했다. 이처럼 평생 일제와 맞서 싸웠으나 열사는 동족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50년 9월 28일(음력 8월 17일) 밤 10시경 열사는 자신에게 총질하는 사람에게 “나는 화양면 창무 사람인데 창무 윤씨를 찾아가서 외팔이 형숙이가 여기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다음날 오후 5시경 마을에 찾아와 이런 사실을 전했다. 소식을 들은 4촌 형제들이 지게를 지고 8km를 걸어서 순교현장에 도착, 시신을 수습하여 열사의 생가에 도착했다. 친척들이 모였고, 어려운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만 살아온 열사의 시신 앞에서 소리 없이 오열했다. 다음날(음력 8월 18일) 구름 낀 가을 달밤은 유난히 처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시신을 마을 뒷산에 가매장했다. 그 뒤 마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국군이 올 때까지 침묵의 나날을 보냈다. 파란만장한 의혈지사 윤형숙의 생은 이렇게 끝났다.

열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일본은 지금도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 열사의 애국애족, 위국헌신 정신을 되새겨야 할 때다. 31년 6개월 18일 온몸을 던져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의혈지사 윤형숙을 가슴 깊이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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