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0일] 2000년 총선 3일전 남북정상회담 발표

2008년 우주정거장에서 8일간 실험한 우주인들

2008년 4월10일 밤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이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 우주인들이 ISS에 탑승하면서 본격적인 우주임무를 시작했다.

소유스 우주선은 오후 10시께 도킹을 시작해 3시간 만인 11일 오전 0시50분께 세르게이 볼코프 선장(34)과 올레그 코노넨코 (43) 비행 엔지니어,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29) 씨가 ISS로 진입했다.

이들은 첫 임무로 ISS에 있는 노트북 컴퓨터에 과학실험에 필요한 소프트웨어가 담겨있는 하드디스크를 설치한 뒤 식물생장실험과 미세 중력환경에서 세포배양 실험, 초파리의 중력반응과 노화 유전자 탐색 실험 등 3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우주인의 얼굴 변화 실험과 극한 대기현상 관측실험, 금속유기 다공성 물질 결정 성장 실험 등도 이뤄졌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에서 얼굴은 부위에 따라 3~7mm 정도 붓고 눈이 평소보다 약 5mm 정도 돌출된다. 이밖에 매일 지구의 밤 시간대의 대기 현상, 미세 중력에서의 금속유기 다공성물질 결정성장 실험 등 총 18가지 우주과학실험이 ISS에 머무는 8일 동안 줄곧 진행됐다.

2008년 라울 카스트로의 쿠바 개혁

2008년 4월10일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평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임금상한제를 전격 폐지했다. 사회주의 쿠바에서는 당시까지 모든 노동자들이 월평균 408페소(약 19.5달러)의 동일 임금을 받아왔다. 동일 임금으로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경제의 90%를 통제하고 있는 정부가 교육·의료·주택 등을 무상으로 지원,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쿠바가 전격적인 개혁조치를 취한 것은 라울 카스트로의 강력한 개혁의지가 작용했다. 그는 각종 연설에서 “사회주의가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의미하지만, 이는 권리와 기회의 평등이지 소득의 평등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평등(equality)과 평등주의(equalitarianism)는 다르다”면서 “소득의 평등은 결과적으로 나태한 자가 책임 있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른 형태의 착취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실용적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라울의 새 통치철학은 과도한 국가보조금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생존력을 갖출 수 있도록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한편 이에 따른 임금 차등지급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을 의미했다.

임금상한제로 끝나지 않았다. 라울은 불과 3개월 뒤인 7월18일 <농지개혁법>을 전격 발표한다. 개인이 최고 40만㎡의 농지를 10년간 임대 경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골자였다. 세금을 납부하는 등 조건을 충족하면 경작권은 자동 갱신된다. 비록 임대 형식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농지 소유를 사실상 허용한 것이다. 쿠바의 농지는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이며 대다수 농민은 국영 농장이나 농업 조합에 고용돼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고 있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교조주의적이고 병영국가적 이미지의 쿠바가 새로운 도약을 위해 과감한 변신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

2000년 4월10일 오전10시 “2000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뉴스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보도됐다.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두고 나온 뉴스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2000년 3월17일 중국 상해에서 첫 접촉을 한 이후 세 차례 중국에서 만나 남북합의서에 서명한 결과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들은 그러나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으로 야당인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1995년 중국 혁명원로 천윈(진운) 사망

1995년 4월10일 오후 2시 중국 공산당 보수파의 대부이자 덩샤오핑의 최대 정적이었던 천윈 전 중국공산당 고문위원회 주임이 베이징 동성구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식자공출신으로 1920년대 상해를 휩쓸던 노동자시위의 배후주동자로 활약하다가, 무장봉기도 주도했다. 1935년 대장정 당시 마오쩌뚱을 지지했던 천윈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성도), 충칭(重慶 중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공산당 재건 비밀공작을 펼쳤다. 그 후 소련 모스크바로 가 코민테른에 홍군 장정과 준이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천윈은 제일 먼저 홍군의 장정을 국내외에 알린 ‘수군서행견문록(隨軍西行見聞錄)’을 집필해 발간했다.

1937년 4월 신장(新疆 신장) 우루무치(烏魯木齊 오로목제)로 귀국해 신장 중공중앙 대표에 임명됐다. 11월에 옌안(延安 연안)으로 돌아온 뒤 중공중앙 조직부 부장을 맡았다. 1945년 6월 중공7기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됐다. 1945년 일본의 패전 당시 팽진, 임표의 군대와 함께 만주 심양지역을 접수, 사회주의화 한 경험을 쓴 보고서 `심양의 접수관리에 관한 종합보고`로 일약 당내에 이름을 떨쳐 `당내 최고의 경제이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8년 10월 중화(中華) 전국 총공회 주석에 뽑혔다. 신중국 건국 후 중앙 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돼 전국의 재정경제 공작을 주재했다. 1954년에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됐고, 상업부 부장(장관), 국가기본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1957년 1월 중공중앙 경제공작 5인소조 조장(組長)에 임명돼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진운은 지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막후에서 중국 정계를 좌지우지한 8명의 혁명 원로 가운데 최고 실권자인 등소평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실력자였다. 그가 내세운 경제사상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이론에 입각한 ‘시장경제론’이며 전통 마르크스 경제론자로 그동안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을 견제해왔다.

그의 아들 천위안(陳元)이 현재 국가개발은행 행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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