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6일] 생일과 제삿날이 같은 라파엘로

2010년 중국 정부, 일본인 마약사범 사형 집행

2010년 4월6일 오전 중국 정부가?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된 일본인의 사형을 집행했다. 중국에서 일본인이 사형에 처해진 건 1972년 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이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고급인민법원은 다이렌(大連)시 간수소에서 2009년 4월 마약밀수죄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일본인 아가노 마쓰노부(赤野光信, 당시 65)씨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선양(瀋陽)의 일본 총영사관에 따르면 이날?사형 집행은 약물 주사 방식으로 이뤄졌다.

일본 정부는 당시 “양국 관계에 해가 되고 국민감정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압박했지만 소용없었다.?일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사형 집행 소식이 전해지기 전 “양국의 사법 시스템이 다르지만 일본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지바 게이코(千葉景子) 법무상도 “중국의 사형집행은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라며 “일본인들의 대중적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그러나 이틀 뒤인 4월8일 일본인 마약거래 혐의자 3명에 대한 사형을 잇따라 집행했다.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마약 밀수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인 3명에 대해?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일본정부의 경고성 우려를 일축한 것이다.

2011년 12월16일 광둥(廣東)성 둥취엔(東莞)시 중급인민법원은 마약거래를 한 40대 일본인 한 명에게 사형, 50대 한 명에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내렸다.

2010년 키르기스스탄, 반정부 시위 발생

2010년 4월6일 키르기스스탄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돼 이 나라 정부가 야당 지도자들을 연행했다. 연행된 인사에는 지난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로 출마했던 알마즈벡 아탐바예프 전 총리와 아타 메켄당 대표인 오무르벡 테케바예프 전 국회의장 등이 포함됐다.

이번 야당 인사 구금은 이튿날인 7일 야권 연합체인 연합국민운동(UPM)이 전국적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예고, 정부가 시위 엄단 방침을 밝힌 상황에서 이뤄졌다.

당시 키르기스스탄 시위는 격렬했다. 1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서북부의 탈라스주 정부 청사를 점거하기도 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나라로 평가를 받았는데, 2005년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이 집권한 뒤로는 언론과 야당 탄압 등 반민주적 사례가 잦아졌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당시 메드베제프 러시아 대통령은 “키르키스스탄의 장기적 내전이 우려된다”면서 개입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2005년에도 키르키스탄에서는 적잖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당시 시위 지도자 중 한명인 에딜 바이사로프는 “처음에는 벨벳 혁명을 본 따 실크 혁명이라 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국 튤립혁명으로 정리됐는데 튤립은 키르키스탄에서 유래돼 네덜란드로 전해졌다.

2008년 부시-푸틴 고별회담

2008년 4월6일 러시아 소치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고별 회담’을 가졌다. 부시 대통령이 공식 임기 중 마지막으로 푸틴을 만난 자리였다. 지난 7년간 대립해온 부시와 푸틴은 이날 자신들의 임기 중 마지막 정상회담에서도 미사일방어체제(MD)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대문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부시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냉전은 이미 끝났다. MD 등이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며 러시아를 달래기 바빴다. 하지만 푸틴은 “우리는 특정 현안에 대해 여전히 심각한 이견을 갖고 있다”며 미국에 대해 껄끄러운 언사를 자제하지 않았다. 노심초사하는 미국과 뻣뻣한 러시아의 현재 처지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두 정상은 이날 안보와 대량살상무기, 테러와 경제 등을 포괄하는 ‘전략 프레임워크’에 서명하며 향후 협력 수위를 높일 것이라는 외교적 수사만 공포하는 데 그쳤다.

당시 언론의 관심은 2008년 5월7일 취임한 푸틴의 후계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AP통신은 부시에게 자신이 직접 고른 후계자를 소개하는 푸틴의 모습이 “자랑스러운 부모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고 묘사했다.

외교 전문가들에 따르면, 옐친 대통령 이래 푸틴 대통령 당시까지 러시아는 대미 외교에서 납작 엎드려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라크전 등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옛 소련의 어법이 등장했다. ‘강력한 러시아’를 내걸어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천연가스 등으로 국력 제고에도 성공한 푸틴은 2008년 5월7일 이후에도 총리로 남아 사실상 러시아의 ‘상왕’으로서 권력을 유지했고, 2012년 3월4일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5월7일 취임식을 가질 예정이다.

1930년 간디, 소금 행진 종료

1930년 4월6일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1869~1948)는 한 달 전 시작한 인종차별과 압박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를 강행했다. 인도를 식민통치하는 영국이 소금세(稅)를 신설한 데 대한 반대운동이다. 간디는 부당한 소금세 신설에 항의하기 위해 바닷가 200마일을 행진했다.

영국군이 총칼로 제지했지만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 10만여 명은 맨몸으로 헤쳐 나갔다. 이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간디와 네루를 포함해 인도인 6만여 명이 투옥됐다. 이번 ‘소금 행진’은 인도 전역에 두 번째 불복종-비협력 운동을 촉발, 영국 상품 불매와 시위, 행진, 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인도 총독 어윈경은 결국 간디가 런던 원탁회의에 인도국민회의 대표로 참석하도록 타협했다. 그러나 인도의 정치적 장래를 다룬 원탁회의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어윈경의 후임인 윌링던경은 강경 탄압정책을 펴서 다시 3만4000명을 투옥했고 인도국민회의를 불법화했다.

감옥에 갇힌 간디는 이번에는 힌두교의 불가촉천민에게도 일반인과 동일한 투표권을 주도록 운동을 전개했다. 도덕적이고 소박한 농촌생활을 지향했던 간디의 이념은 현대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네루조차도 인도의 산업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도덕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과 실천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1960년대 미국 흑인 인권운동 등 사회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흉탄에 맞아 생애를 마감한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1896년 4월6일 제1회 근대올림픽이 이날 개막됐다. 장소는 그리스 아테네였다. 판아테나익 스타디움에 6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393년을 끝으로 1500년동안 중단됐던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10개 종목(육상, 사이클, 수영, 체조, 역도, 레슬링, 펜싱, 사격, 테니스, 마라톤)에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출전해 열흘간 힘과 기를 겨뤘다. 개막 첫 경기는 100미터 달리기였다.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설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의 공이 컸다.

1520년 라파엘로 태어난 날 죽다

1520년 4월6일 르네상스 시대 고전예술 작가인 산지오 라파엘로가 영면했다. 37년 전인 1483년 같은 날짜에 태어난 라파엘로는 같은 날짜, 생일날 갑자기 숨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화가이자 건축가)중 한 명인 라파엘로는 용모가 뛰어났고 성격도 쾌활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다 빈치의 명암과 미켈란젤로의 조형법을 익힌 라파엘로의 예술은 ‘고전양식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동시에, 감성이 풍부한 자연주의와 이지적 추상화 그리고 섬세 우아한 요소를 융합한 회화예술의 완전한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508년 로마 바티칸궁을 개조하는 대역사에 참여했다. 브라만테가 성베드로대성당 재건작업을 벌이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그림을 그릴 때 교황의 거처 중 하나인 스탄차 델라 세나투라에 ‘성체에 관한 논쟁’, ‘아테네 학당’을 그렸다. 또 브라만테가 죽은 뒤 성베드로대성당 재건작업을 완성했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와 인문주의 철학을 배운 라파엘로는 늘 겸손과 신중함으로 인간의 고결함(신플라톤주의적 이상)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모두 르네상스를 풍미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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