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1회

④ 라오스의 별

“책임자가 누군가?”
이튿날 오전, 강 전무가 피트니스 건물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날의 사고 이후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기준이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스파 시설은 이상이 없었잖아?”
기준은 뒤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직원들에게 물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스위치를 눌렀는데 갑자기 전기가 팍…….”
시설부 전기 담당자는 당황한 나머지 아직도 온몸을 떨고 있었다. 1층 스파 시설을 최종 점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인데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잖아?”
“접니다, 전무님.” 강 전무의 다그침에 기준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김 차장 자네가 전기 배선 공사의 현장 감독인가?” 강 전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한 쪽에 몰려있는 현지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루앙이 강 전무 쪽으로 나섰다.???
“사고의 원인은 전기 배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루앙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전기 쪽이 아니라 욕조 내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강 전무의 인상이 잔뜩 굳어졌다.
“욕조가 잘못됐다고? 욕조가 불량이라? 그렇다면 이건 더 큰 일 아닌가.”
“제 얘기는 사고의 원인을 조사할 때 욕조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김 차장, 타이의 욕조 제작사에 연락해서 문제를 파악하고 당장 대책을 마련하게. 오늘 중으로 전체 욕조에 대한 재점검도 실시하고.” 기준에게 지시를 내린 강 전무가 다시 루앙 쪽을 향했다. “욕조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전기 담당자에게는 예방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루앙이 시선을 거두지 않고 강 전무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준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루앙이 입을 열었다.?
“책임자를 찾아내서 추궁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접니다. 제가 전기 배선 공사를 감독했습니다.”
강 전무가 싸늘한 표정으로 루앙을 쏘아보았다.?
“루앙 팀장, 자네는 지금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실감이 나지 않는가? 오늘 중으로 사고 경위서 제출하도록 하게.”

일과를 마칠 즈음 기준은 루앙이 일하고 있는 현장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루앙은 자리에 없었다. 식당 등 몇 군데를 뒤져보다 집히는 곳이 생각났다. 예상대로 루앙은 코끼리 사육장 옆의 막사에 있었다. 그는 혼자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준이 다가가자 그는 조용히 바둑알을 내밀었다. 무숙자가 서울에서 보내온 바둑돌이 병뚜껑을 대신해서 전등 불빛에 반짝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대국을 시작했다. 초반과 중반을 지나면서 기준은 루앙이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둑알을 놓는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왠지 선수를 자꾸만 양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을 짓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길을 내주며 자꾸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기준이 이유를 물었다.?
“왜 그러는 겁니까?”
루앙이 무슨 말이냐며 기준을 바라보았다.???
“전기 배선 쪽은 관련이 없었잖아요. 왜 책임을 자초했어요?”?
루앙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바둑에서는 나아가고 물러갈 때를 확실히 알아야 하죠.”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요?”
기준이 공세적으로 바둑돌을 놓았다.
“부지배인은 지금 현장 직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요.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무책임한 ‘라오스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어야 하고요. 그러니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요.”
“루앙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혹시라도 부지배인이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바둑을 두다 보면 가끔씩은 이기는 길이 아니라 내가 가보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돌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오늘 루앙의 바둑은 수읽기가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반으로 갈수록?루앙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묘연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으로 봐서 기준의 흑 돌은 별 문제가 없다. 우변의 흑도 살아있고 좌변의 흑도 건실하다. 나머지는 하변의 흑 뿐이다. 그런데 기준은 심란해졌다.
그때 루앙이 기준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코이코이 바이”
그건 기준도 정확히 뜻을 알고 있는 라오어였다.??
“천천히, 여유 있게 하라는 뜻 아닌가요?”
“예전에 모택동이 대약진운동이라는 경제정책을 내놨을 때…….”
오늘따라 루앙의 바둑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끝내기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때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농업 혁신이었습니다. 모택동은 우선 농업에 가장 해로운 네 가지 동물을 지목했지요. 파리, 모기, 쥐, 참새였던가요? 그때부터 중국 전역에 대대적인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파리, 모기, 쥐, 참새를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인 겁니다.” 루앙이 이야기를 끊고 기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농업 혁신 운동이 가져온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지요. 3년 뒤부터 대기근이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참새를 죽였으니 해충이 늘 수밖에요. 모택동이 해로운 동물이라고 지목한 참새가 생태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농사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조망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기준은 대학 시절 철학을 공부하던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전체적인 연관성을 미처 생각 못한 거로군요.”
루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앙의 가슴 속에 담긴 말이 이것이란 말인가. 부서 간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계획을 밀고 나갔을 때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계속된다면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생기게 될 것인지를 경고하는 것인가. 그걸 나에게 또 강 전무에게 전하고 싶은 것인가.?
“통찰에 있어 예측과 조망은 뗄 수 없는 조건이지요. 변화 속에서 예측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바로 관계 속에서 조망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루앙이 백돌을 다시 들었다. 이제 승부처는 하변 밖에 없다. 겨우 한 점을 따내고 상변에 커다란 집을 허용한 것은 하변에서 승부를 걸기 위한 준비 과정인 셈이었다. 루앙의 백돌은 승부를 늦추지 않았다. 흑이 잡힌다는 보장은 없지만 공격을 통해 또 다른 곳을 잡겠다는 수가 보였다. 기준은 추격을 당하는 압박감을 느꼈다. 물론 기준 역시 교묘하게 헤쳐 나갈 길이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결국 루앙의 은근한 공격은 기준의 기를 꺾어놓았다. 두 사람이 하변의 승부처를 두고 공방을 끝냈을 때 바둑의 형상은 근소한 차이로 백이 우세를 보였던 것이다. 루앙의 속마음을 읽으려는 사심이 지나쳤던 때문인지, 기준 스스로 자신의 심리 변화에 말려들었는지 승부는 다시 백으로 기울었다.???????
“왜 거기다 바둑돌을 놓았습니까?”
대국을 마치고 복기를 할 때마다 루앙이 하던 말이었다.
“손에 있을 때와 바둑판에 놓였을 때, 바둑돌은 의미가 아주 달라지지요. 바둑돌 하나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대국의 형세가 바뀌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하수들은 자신이 둔 바둑돌이 어떤 길을 따라 가는지, 어떻게 집을 만들어 가는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 말에는 저도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떻게 매순간 끊임없이 선택을 하면서도 잘 살아가는지 말이지요. 하기야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끊임없이 계산하고 따져보지만 정작 중요한 선택에서는 주저하다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지요. 적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후회하거나 아예 선택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숙소로 돌아오며 기준은 루앙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내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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