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저항하는 연극 ‘낯선 사람’ 그리고 ‘1980 광주’

낯선 사람

[아시아엔=류재국 고대희극연구가, 문화비평가] 5월 10~19일 극단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제작으로 문래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낯선 사람>(각색·연출 임형진)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미완성 소설을 연극으로 완성한 것이다. 원작은 4쪽짜리 미완성 본이다. 작품 소재가 1세기 조금 전 유럽 침략에 맨손으로 저항했던 중국 의화단의 민중혁명이지만, 연출가 임형진이 제시한 의도는 완성되지 않은 인간의 삶을 반성의 기회로 전환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극의 종막에는 고질적 역사의 반복과 정신의 충돌, 개인과 집단의 윤리적 문제를 무대에 남겨둔 채로 말이다.

악인의 성실성에 대하여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지 120년, 세계인의 의식 속에 잊혀져가던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전혀 생소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당시 유럽연합군은 맨주먹의 중국인들을 혁명재판 명목으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한다. 그들의 군대와 총칼을 앞세운 가해자 모습은 1980년대 광주를 관통한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도 국가의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으로 맞선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한다.

<낯선 사람>에는 연합군 장교 울리히 외에도 중국인 혁명가 천사오보와 손녀 바넷사, 오페라성악가 리웨이가 나온다. 필자는 정복자 울리히와 혁명가 천사오보의 대립에 집중한다. 울리히는 일련의 의화단혁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을 시대가 요구하는 사태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훗날의 역사적 평가를 핑계 삼아 혁명 뒤에 숨어 과오를 정당화한다. 동시대의 폭력을 시대적 혁명으로 둔갑하려는 어처구니없음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낯선 사람>에서 울리히가 “힘은 모든 사람들 앞에 정직한 거야”라며, 오른 팔을 들 때 독재자의 모습을 보았고, 그의 입에서 바그너 음악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힘을 가진 인간은 윤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실한 인간으로 합리화한다. 작품 속 바넷사가 “나쁜 놈들은 정말이지 언제나 열심히 살아요”를 외칠 때 우리 주변의 낯설지 않은 나쁜 인간을 쉽게 떠올린다. 그는 오른손의 아바타로 살면서 39년간 뉘우치지 않고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악인과 성실성을 언급한다. 악인은 그의 성실성에서 공적(功績)을 끌어내고, 성실성을 타인에 대한 무기로 삼고 있다. 공적이 있는 사람은 그가 악인으로 있는 한 악인이 아닌 피해자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는 조직의 힘을 빌려 너무나 성실한 자기기만에 빠져 사악한 행위 자체의 합리화를 통해 자기를 자기기만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선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낯설지 않은 괴물의 실체

<낯선 사람>은 문법이 있는 연극이다. 전반 장면에서 울리히의 손녀 바넷사의 건반악기 연주와 울리히의 라디오에서 ‘마이웨이’ 선율이 닫혔던 과거 속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그 소리는 침묵하던 일상의 숨소리, 심장의 박동소리다. 결국 관객은 계몽하지 않았는데도 미몽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120년 전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관객의 정신을 현재로 이어지는 확장된 과거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저 새로운 연극적 행동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문법이다.

아픈 과거와 보이지 않는 미래 사이에서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한 가지는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음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힘의 존재이다. <낯선 사람>의 작가 슈니츨러는 4쪽짜리 미완성 소설에 힘과 억압을 그렸다. 그리고 연출가 임형진은 이 짧은 호소에 아프고 힘들었던 1980년대에 대한 회한과 어두운 그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진실의 소중함을 드러낸다. 연극무대의 완성도는 관객들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야 할 몫이다.

이 작품에서 결국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공포’와 ‘분노’의 대립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변함없는 천사오보의 의연함에 정복자 울리히는 질투를 느낀다. 몇십년이 지나 천사오보는 울리히의 영혼을 괴롭힌다. <낯선 사람>은 1980년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배경으로 우리사회의 혼돈과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을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울리히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시대와 역사 앞에 뭉친다.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그들을 보며 관객들은 분노한다.

2019년 5월 18일, 울리히가 마주하기 싫었던 천사오보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금 나타난 그들도 처음에는 울리히와 천사오보의 사이에서 낯선 사람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혁명가 천사오보의 편에 서서 낯설지 않음을 인정한다. 낯설지 않은 울리히라는 괴물의 추악한 과거를 알고 있었지만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권력 앞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던 미약함이 그것이다. 이제 양심이 움직여 천사오보의 눈으로 괴물의 죄상을 하나 둘씩 세상에 드러낸다. 어차피 괴물은 낯선 사람(모르쇠)으로 남기를 바라며 뉘우치지 않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벌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2 comments

  1. 1980년 광주의 5월을 재평가하고 있는 요사이 해당 연극에 대한 소개만으로도 와닿네요.
    악인의 성실성이란 소제목에서 나치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더군요.
    좋은 비평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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