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일] 타이완 총통 장제스 사망

2009년 오바마 ‘핵감축 세계 정상회의’ 제안

2009년 4월5일 당시 유럽을 순방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체코의 프라하성 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청중에게 “핵무기를 사용한 적이 있는 유일한 나라로서 미국은 도덕적 책임을 느끼며, 세계는 핵무기 확산 방지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1년 안에 핵무기를 감축하고 궁극적으로 핵무기 폐기를 위한 세계 정상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핵무기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오바마는 “나는 순진하지 않으며 이런 목표는 내 일생 동안 달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도 “핵무기 확산이 제어될 수 없고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가장 강력한 파괴의 도구를 갖는 세상에 살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이야말로 치명적인 적이다”라고 경계했다. 그는 “전세계가 동참해야 하며 미국만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전쟁 억제책으로 계속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는 미국의 안보전략에서도 핵무기의 몫을 축소하고 국제 감시활동도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바마의 이런 계획에는 핵무기 확산금지와 핵무기 관련물질의 제한 등도 포함됐다.

포괄적 핵실험금지 조약(CTBT)은 1996년 유엔 총회에서 어떠한 형태나 규모, 장소에서도 핵폭발 실험을 금지한다는 내용으로 채택됐으며, 140개국이 비준했지만 핵기술을 보유한 44개국 가운데 35개국만 서명·비준했다.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여기에 서명했지만 1999년 상원에서 부결됐다.

2005년 한국의 천년고찰 낙산사 잿더미로

2005년 4월5일 한국 강원도에서 발생한 산불이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절 ‘낙산사(洛山寺)’로 번지면서 낙산사 동종, 원통보전, 홍예문, 대웅전 등 주요 문화재가 불에 타 없어졌다.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은 보물에서 지정 해제됐다. 산불 이후 동종은 복원됐지만 다시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보물 제479호는 영원히 결번으로 남아 있다.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義湘)이 처음 세웠다고 한다. 858년을 비롯해 고쳐 짓기를 거듭했다. 지금 건물은 한국 전쟁 때 없어진 것을 1953년에 다시 지은 것인데, 2005년 4월5일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돼 2007년 4월5일에 복원됐다.

낙산사는 여러 번 불타 없어졌었다. 그때마다 한국에는 큰 재난, 주로 전쟁이 있었다. 1231년 몽고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조선시대 세조 때 크게 중창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또 불 타 없어진 것을 구한말 때 다시 복구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또 화재로 스러졌다. 2005년에도 뭔가 큰 전쟁이 있었던 걸까. 한국 사람들은 그것이 전쟁인 줄도 모르고 넘어간 걸까.

1998년 세계 최장 현수교 일본서?개통

1998년 4월5일 일본이 3800만 미국달러(5000억 엔)를 들여 혼슈와 시코쿠사이를 이은 아카시 해협 대교(明石海?大橋, 아카시 가이쿄 오하시)를 개통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가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전장 3911m, 중앙 지간 1991m다. 대교 주탑의 높이는 해면상 298.3m로 일본 도쿄 타워 (333.0m)에 버금가는 구조물이다. 1995년 1월17일의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지반이 꺼져, 1m 늘었다.

당초 도로와 철도가 함께 지나가는 다리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건설비 문제로 1985년 8월27에 도로만 짓기로 방침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리 이름을 공모해 ‘펄 브리지(Pearl Bridge)’라는 애칭이 정해졌지만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관리자 혼슈 시코쿠 연락 고속도로에서조차 사용하고 있지 않다. 고속도로 안내표지에 이 애칭이 쓰이기도 했지만 생략해서 ‘아카시 대교’로 불리는 일이 많다.

설계당시 다리 위 주행속도는 시속 100km였지만 현재 제한 속도는 평상시 최고 시속 80km·최저 시속 50km다.

1994년 너바나 보컬리스트 커트 코베인 자살

1994년 4월5일 미국 록그룹 ‘너바나’의 보컬리스트 커트 코베인이 자택에서 자살, 사흘 뒤인 4월8일 발견됐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코베인 곁에는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경찰 은 그가 4월5일 권총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향년 스물 일곱.

중학생 때부터 마리화나를 피웠을 정도로 심한 마약 중독자였다. 말년에는 헤로인에 중독되어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말이 씨가 된다고, 어린 시절 코베인은 종종 친구들에게 27세에 생을 마감한 뮤지션들을 지칭하는 ‘27클럽’ 멤버가 되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27클럽은 1969~1971년에 요절한 4명의 팝 뮤지션을 일컫는다. 롤링스톤스 멤버 브라이언 존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이 이에 속한다. 가난하고 우울한 성장기를 보낸 코베인은 이들의 음악을 흠모했다. 그리고 결국 27살에 자신의 손으로 인생을 마감한 뒤 ‘27클럽’의 일원이 됐다.

1975년 타이완 총통 장제스 사망

1975년 4월5일 타이완 총통을 지내며 아시아의 대표적 반공정치가로 활약한 장제스(蔣介石)가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1887년 10월31일 중국 절강성에서 태어나 1906년 보정군관학교, 191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23년에는 소련을 시찰하고 돌아와 황포군관학교장이 됐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이 됐다.

1927년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고 1928년 베이징을 점령했다. 1937년 이른바 국공합작을 이뤘을 때 육해공군 총사령관직을 맡아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다시 중국 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했지만 1949년 12월 완전히 패퇴해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겨 중화민국 총통이 됐다. 1948년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으나 1954년 총통에 재선, 임종까지 5선을 기록했다. 1971년 타이완정부가 국제연합에서 의석을 잃자 실의에 빠져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1926년 양기탁 길림서 고려혁명당 조직

1926년 4월5일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항일독립운동조직인 고려혁명당이 결성됐다. 당시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 진영 일부에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그것의 국제적 옹호를 사명으로 하는 제3인터내셔널 정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에 주력했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추세에서 정당정치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 만들어졌다.

창당 당시 간부진은 위원장 양기탁, 책임비서 이동구, 위원 정이형·현정경·고할신·오동진·이동락·김봉국·현익철·이규풍·최소수·주진수·곽종대 등 13명이었다. 당원수는 모두 1500여 명이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12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와해됐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섞여 조직된 탓에 항상 내분이 존재했다.?이런 분열을 틈타 일본의 간계가 끊이지 않았다. 분열로 민족주의자들이 대거탈당한 뒤인 1927년 12월 이동락, 정이형, 이동구, 이원주, 유공삼 등이 하얼빈에서, 그 밖의 간부 14명이 국내와 만주 등에서 각각 일본 경찰에 붙잡혀 이후 사실상 당이 무력화됐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