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기다려 결혼한 북한-베트남의 ‘금지된 사랑’

리영희(오른쪽)씨 부부 <사진=조선일보>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2월 19일자 <조선일보>에 “31년 기다려 결혼한 ‘금지된 사랑 48년’ ‘결국 사랑이 사회주의를 이겼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북한의 한 여성과 베트남 남성이 30년 넘게 써내려온 애틋하고 운명적인 러브스토리다..

이야기 주인공은 현재 하노이에 사는 북한여성 리영희(70살)씨와 베트남 출신 팜 녹 칸(69살)씨다. 젊은 시절 북한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좀처럼 국제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북한체제의 벽에 가로막혀 ‘금지된 사랑’(Forbidden Love)을 이어오다가 무려 31년간의 오랜 기다림과 국경을 넘나든 헌신적인 사랑을 거친 뒤에야 결혼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부부에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랑이 결실을 본 비결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이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는 멀리 5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당시 27살 화학도였던 팜 녹 칸은 베트남 당국이 전후 복구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북한에 파견한 유학생 200명의 일원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 그리고 1971년 북한의 한 비료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칸은 연구실에서 일하던 1살 연상의 리영희씨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갖게 된다.

국적이 다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때부터 외모를 꼭 빼닮은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부인 리영희씨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친구들이 ‘공장에 너를 꼭 닮은 베트남 청년이 있다’고 전해줬는데, 칸을 처음 보는 순간 그 사람임을 직감했다. 정말 멋진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는 아무리 잘생긴 남자를 봐도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그가 문을 여는 순간 내 마음이 녹아내렸다”고 첫 만남의 순간을 회상했다. 남편 칸 역시 리씨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꼭 그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를 내 그녀에게 접근해 주소를 받아냈다고 했다.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몰래 사랑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이후 리씨의 가정집을 오가는 대담한 사랑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칸의 가정집 방문은 당시만 해도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자칫 적발될 경우 처벌까지 감수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마치 게릴라전 같은 극비 방문이었다”고 회상한 칸씨는 이를 위해 북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버스로 3시간을 달린 뒤 2㎞ 가량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북한과 베트남 모두 사실상 국제결혼을 금지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이었다. 1973년 칸이 유학 일정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귀국하면서 둘은 결국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했다. 하노이로 돌아온 뒤 체제에 환멸을 느낀 칸은 한동안 공산당 가입도 거부하는 등 실의에 빠져 지낸 것으로 전해졌다. 당 고위 간부의 아들로 마음만 먹으면 출세가 보장돼있는 신분이었지만, “인민들의 사랑마저 막은 사회주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게 칸의 설명이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힘겹게 이어가던 두 사람의 사랑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귀국 5년만인 1978년, 칸이 북한을 찾아 리영희씨와 재회했다. 하지만 결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속에 두 사람은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그해 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계기로 북-베트남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나마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던 편지 교환마저 중단됐다.

이후 10년 넘게 연락이 끊긴 두 사람을 다시 이어준 건 북한에서 날아든 한 장의 편지였다. 1992년, 리영희씨가 칸에게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며 사랑을 재확인하는 편지를 북한에서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날 방법은 여전히 국제결혼뿐인 상황이었다. 칸은 곧바로 북한 당국을 설득할 방법을 궁리했다.

1990년대 후반 기아 상황이 심각해지자, 북한은 베트남에 대표단을 보내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개혁정책을 추진하며 서방에 기울어 있던 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리씨와 가족들의 안위가 너무 걱정된 칸은 친구들로부터 7톤 가량의 쌀을 모아 북한에 보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북한당국의 마음을 얻어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칸의 이런 행위를 전해들은 북한 관리들이 “리영희씨가 북한 국적만 유지한다면, 결혼해 어느 나라에서 살아도 좋다”고 둘의 결혼을 전격적으로 허용했다. 북한당국의 자국민 국제결혼 허용은 당시만 해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드디어 처음 만난 지 31년만인 2002년, 두 사람은 양국 하객들의 축하 속에 평양 주재 베트남대사관에서 감격의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하노이에 정착해 18년째 애틋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31년 기다림 끝의 결혼한 ‘반세기에 걸친 순애보’가 애절하지 않은가? 몇번의 만남으로 30년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기적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체제가 다른 머나먼 타국에 떨어져 살면서 순애보를 써내려간 것은 아무래도 선뜻 이해가 안간다.

그러나 그것은 부부가 7천겁의 인연으로 만난 사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쉽게 풀린다. <법망경>(法網經)에 보면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500겁 인연이라고 했다. 한 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1천겁,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면 2천겁,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자면 3천겁, 한 민족으로 태어나며 4천겁, 한 동네에 태어나면 5천겁, 하룻밤을 같이 자면 6천겁, 부부가 되는 것은 7천겁의 인연으로 된다고 한다.

베트남 남편 팜 녹 칸과 북한 부인 리영희(70)씨 부부의 31년간의 사랑처럼 부부 인연은 사회주의를 이길 만큼 지고지순(至高至純)하다. 가정의 비롯은 부부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먼저 도가 있어야 한다.

첫째 화합(和合) 둘째 신의(信義) 셋째 근실(勤實) 넷째 공익(公益)이다. ‘금지된 사랑’을 이겨낸 팜 녹 칸과 부인 리영희씨의 순애보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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