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5.18 망언 3인방에게 전하는 원불교 원로의 ‘고언’

5.18 참상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만물유전(萬物流轉)이라는 말이 있다. 만물이 끊임없이 변하여 끝이 없다는 말이다. 만물유전을 불교의 근본도리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제행무상은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화해 간다는 것’으로서 만무만상(萬無萬象)의 근원을 공(空)으로 보고 만물은 본래부터 만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나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있다.

‘일념’이란 말은 인도에서 사용되었던 지극히 짧은 시간의 단위를 말한다.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지금의 이 짧은 시간에도 전 우주에서 변화의 반복이 삼천이나 된다는 것이다. 생물체의 물질도 지극히 짧은 시간에 낡고 낡은 것은 버려지고 새것으로 바뀌고, 새것이 바로 헌것이 되고, 다시 새로워지는 시대가 헤아릴 수 없이 빨리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노병사’의 변화도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사냥할 때, 얼음 바닥에 동물의 피를 묻힌 칼을 거꾸로 꽂아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늑대가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와 칼을 핥기 시작한다.

늑대는 처음에는 칼날에 묻은 피만 핥지만, 차츰 칼날을 핥게 되고, 결국에는 그 칼날에 자신의 혀를 베이게 된다. 그런데 이미 피맛에 취한 늑대는 그 피가 자신의 피인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핥다가 과다 출혈로 결국 쓰러져 죽는다. 그때 에스키모들은 죽은 늑대를 가져간다.

21세기 하루가 다르게 세계가 변화되어 가고 있다. 사람도 변화되어 가는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나를 죽이지 않으려면, 오랜 세월동안 타성에 젖어있는 자신을 현실에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힘이 센 강자도 아니고, 두뇌가 뛰어난 천재도 아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했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성공 비결이다.” 빌게이츠도 또한 스티브 잡스도 변화했기에 세상을 바꾸었다. ‘Change(변화)’의 g를 c로 바꿔보면 ‘Chance(기회)’가 된다.

만물유전!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변화는 위기이자 바로 기회다. 변화 속에 진짜 기회가 숨어있다. 성공은 얼마나 예측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변화에 얼마나 잘 대처하냐에 달려있다. 멈추면 죽는다. 살아있다면 변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을 한다.

그런데 지금 변화를 거부하는 극우(極右) ‘수구꼴통’의 행태는 꼭 죽은 자들의 함성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수구꼴통’이라는 말은 옛것을 지키고 따른다는 ‘수구(守舊)’라는 뜻과 사람을 속되게 말하는 ‘꼴통’이라는 단어와의 합성어다. 특정사회의 기득권층은 현 체제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조금의 변화조차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전 대표는 “한국당 5.18 망언 3인방은 반역사적, 반사법적, 반국민적 인물”이라고 했다. 필자의 생각은 이들을 법으로 제재하기 보다는 의식을 개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본다. 의식개조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 중용, 중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중도(中道)는 한쪽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중도를 ‘도(道)’라고 한다. 즉 중도는 ‘가장 적합한 도’ 혹은 모든 것의 ‘중앙이 되는 도’ 라는 뜻이다. 중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나 행동을 벗어나서 있다. 즉, 생이 있다, 죽음이 있다, 더러움이 있다, 깨끗함이 있다, 부귀가 있다, 가난이 있다, 무와 유, 공과 색, 성인과 범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등의 의미에 속하지 않는 것이 도다. 중도는 허공과 같이 투명하므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나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을 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중도라는 말이다. 중도 행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무심으로 착함(善)을 행하고 악함(惡)을 행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자신이 국회의원이라는 생각이 없고, 개인의 이익은 버리고 공심(公心)으로 국가와 민중을 위하여 소신껏 봉사했으면, 하고 난 다음에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중도 행을 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했으나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면 중도를 행한 사람이다.

중도주의(中道主義)는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인 정치성향을 의미한다. 정치 성향이 중도라고 소개했을 때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사실, 완벽에 가까운 진정한 중도주의라는 것은 실현하기 매우 힘들다. 현실적으로 정치라는 것이 양자택일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중도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정치적으로 중도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도가 없으면 좌우간의 소통을 이끌어낼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에 정치극단주의가 극심해지게 되어 각종 갈등이 격화되기 쉽다. 그리고 이 갈등을 이용하려는 과격파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도를 행하는 정치인이 있어야 양 극단에서 죽기 살기를 거듭하는 이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에 종말을 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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