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 ‘폴란드로 온 아이들’과 32년 전 바르샤바의 ‘추억’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포스터 <사진 연합뉴스>

[아시아엔=최병효 주노르웨대사, LA총영사 역임] 추상미 감독의 기록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2018년 이맘때 상영됐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1953년 북한이 폴란드로 보내 교육시킨 1500명의 고아들에 관한 탐사영화로 인종과 국경을 넘은 폴란드인들의 인간애가 깊은 감명을 준다.

​북한은 전쟁 중 남한지역에서도 고아들을 데려갔는데 전쟁 후 국가재건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수천명의 고아를 소련 등 동구권 국가에 보내 교육받도록 했다. ​폴란드계 유태인 학살을 경험하고 2차대전 와중에서 많은 고아가 생긴 폴란드는 북한의 고아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동구권에 보내진 고아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으로 1959년 북한내 주체사상의 등장과 천리마운동의 와중에서 중·고교 재학 중에 모두 북한으로 소환된다. ​이들을 받아준 폴란드로서는 ‘폴란드로 온 아이들’이지만 북한측에서 보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문제는 폴란드를 떠나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의 앞날이 대부분 불행으로 마감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당시 아이들을 가르쳤던 선생님들과, 1955년 폴란드에서 病死하여 묻힌 김기덕이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2006년 폴란드에서 발간된 소설 <천사의 날개> 작가 인터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렇다 되니 ‘폴란드로 온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추상미 감독 <사진 연합뉴스>

추상미 감독은 근래 한국에 온 탈북자 ‘이송’이라는 여배우 지망생을 데리고 가서 고아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그녀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 듯하다. 특이한 시도이기는 한데 고아들과 ‘이송’ 간의 특별한 감정적 연관성을 맺는 데에는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앞으로 이 소재를 우리 작가가 한편의 휴머니즘 소설로 써서 영화화하는 시도를 한다면 의미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북한에서 온 아이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 11월 ​폴란드와의 수교 직후 바르샤바에 우리 대사관 창설 차 가서 만난 폴란드인들을 통해서였다.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폴란드 외교부 직원들과 폴란드 국영통신 평양특파원으로 근무한 인사 등이 그들이다.

​영화에서는 2010~2015년 폴란드 대통령을 역임한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가 대통령으로서 한국을 방문하던 중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나도 고아들과 놀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자세히 알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1990년초 서울에 공식보고를 하여 ​그 사실이 알려졌었다. ​물론 당시 우리 정부에서는 그 보고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언론에서는 수년 후 단편적으로 보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폴란드 생활을 추적했으면 ​의미 있는 스토리를 더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1989년 말 필자는, 얼마 전 폴란드 국영통신의 ​북경과 평양 특파원을 마치고 본사로 귀임해 아시아부장을 맡고 있던 에르지 바이에르(Jerzy Bayer)와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내게 됐다. 당시 나는 그로부터 고아들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는 평양 방문 때마다 폴란드에서 교육받고 간 고아들의 근황을 물었으나 금기사항이라고 하면서 감췄다고 하였다.

그들은 북한체제에 적응하지 못하여 탄광이나 오지로 보내졌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일부는 북한사회에서 출세하여 고위직까지 오른 고아 유학생의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선진교육을 받고도 북한에서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이었다.

바이에르는 2000년대 초에는 폴란드의 주태국대사로 근무하였으나, ​나는 1993년 1월 폴란드를 떠난 후에는 그를 만날 기회가 없어 간접적으로 그의 근황을 들었다.

최병효 주폴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대리대사가 1989년 11월 대사관에 현판을 걸고 있다. 당시 대사관 사무실을 확보하지 못해 바르샤바의 마리오트호텔을 빌려 대사관 겸 숙소로 임시 사용했다. <사진 최병효 대사 제공>

필자는 1989년 11월 15일 폴란드 부임 후 11월 23일 폴란드 정부에 대사관 창설을 문서로 통보하고 활동하였는데 ​그 직후 어느 리셉션에서 북한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접근해와 “여기는 사회주의국가로서 남조선에서 올 곳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꾸짖듯이 말하면서 절대 북한을 흡수통일일랑 할 생각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로서는 그때까지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웃음이 나왔다. ​당시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 할 것이 명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이 거론되고는 있었지만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 하려고 하는 어떤 생각이나 움직임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으로서는 당장 소련 등 공산권과의 수교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한을 흡수통일 할 여력이나 연구도 없던 때였다.

​그런데 그 북한대사가 폴란드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한다는 것과 ​그가 고아출신으로 50년대에 폴란드에서 교육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뿐 아니었다. 북한대사관 무관도 가끔 만나는데 그 역시 폴란드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기에 알아보니 역시 폴란드에서 교육받은 고아출신이었다.

​폴란드에 보내 교육시킨 인재들을 북한정부가 모두 방치·용도 폐기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가 폴란드에 부임했을 당시에 폴란드 대학에는 200여명의 북한 유학생이 있었는데 대사관 개설 직전에 북한에서 특별기를 보내 이들 모두 데려갔다.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이들의 학업을 중단시킨 셈이 됐다.

​이미 1989년 여름 그단스크대학에서 공부하던 북한학생이 독일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한 사건이 있었기에 북한으로서는 한국대사관이 생기면 ​많은 망명자가 생길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내가 부임한 며칠 내의 일로서, ​체코 프라하공대에 유학중이던 북한학생이 같은 대학의 폴란드 친구의 도움으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우리 대사관 겸 숙소로 쓰고 있던 바르샤바의 마리오트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당시 나는 혼자 부임하여 대사대리 직책을 맡고 있었다. 서울과의 비밀 통신수단도 없어 이를 처리하기가 곤란하였다. ​당시 서울과의 국제전화는 하루 종일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많이 기다리지 않고 통화가 가능한 곳이 비엔나였다.

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둘 테니 ​다시 체코 국경과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비엔나로 가라고 하였다. ​여권도 없는 그는 다행히 며칠 후 비엔나 우리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소련에 유학중인 두명의 북한 대학원생이 ​대사관에 나타났다.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공학을 전공 중인데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는 소련 신문을 보고 고려인 여권을 사서 왔다고 하였다. 소련이나 폴란드 국경수비대가 ​동양인 얼굴을 구분하지 못해서 무사히 통과된 것이었다. ​

당시 폴란드 정부의 경우 대통령은 공산당, 의회는 자유노조계가 장악한 동거정부였지만 ​대세는 자유노조로 기울고 있어 이들을 동베를린으로 보내는데 쉽게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 ​

당초 우리 여권을 발급해 보내려고 했으나 폴란드측은 흔적이 남고 ​북한과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들어온 그대로 소련여권을 사용해서 보내라며 ​국경에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하였다. ​역시 폴란드와 동독 국경을 무사히 통과해서 동베를린에 도착해 거기서 우리 요원들이 서베를린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소련에 온 북한 벌목공과 가수 등의 망명을 무사히 처리한 기억이 생생하다.

소련에 유학 중 망명을 신청해 온 두 학생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북한에서 배경도 좋고 엘리트로서 귀국하면 장래가 보장되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에게 그냥 북한에 돌아가서 내부에서 개혁을 추진하며 통일에 대비하면 좋겠다고 하고 망명을 일단 거절하였다. 부모가 처할 어려움도 생각해 보고 꼭 한국에 가겠다면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둘은 다음날 다시 찾아왔다. ​

그들은 부모가 자식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겠지만 한국 사정을 알고 있으며 자식들이 한국으로 간 것을 알면 고난을 감수하고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목이 메고 더 이상 이들의 망명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대표 포스터 <사진=화성시 제공>

One comment

  1. 추상미 감독의 다큐 영화, ‘폴란드로 온 아이들’을관중이 텅빈 잠실 롯데시네마에서 본 바가 있습니다.
    최병효 대사님의 기고글, 재외동포 연구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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