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남은 무술년 이것 한번 해보실래요? ‘용서’와 ‘베풂’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인간관계에서 배신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 필자는 젊어서 한 때 여러 사업을 하면서 배신으로 치를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이 들어 진리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 알면서 배신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자신에 대한용서는 물론 상대방의 배신까지 용서하게 되었다. 또 미움마저 감사한 마음으로 돌릴 수 있게 됐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오히려 더 배려하고 더 베푸는 정도가 되었다.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다. 또 베풂이란 불가(佛家)에서는 보시(布施)라고도 말하는데,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佛法)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보시는 육바라밀(六婆羅密)의 제1 덕목이다.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는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이타정신(利他精神)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보시를 행할 때는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그리고 베푸는 것도 모두가 본질적으로 공(空)한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보시에 세 가지가 있다.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며,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아는 만큼의 불법을 설명하여 수련을 돕는 것이고,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그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원망까지도 감사로 돌린 ‘산삼도둑’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나무꾼 박씨는 걱정이 태산이다. 혼기를 한참 넘긴 딸이 올해는 가겠지 했는데 또 한해가 속절없이 흘러 딸애는 또 한살 더 먹어 스물다섯이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딸 탓이 아니라 가난 탓이다. 박씨는 일년 열두달 명절과 폭우가 쏟아지는 날을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에 올라 나무를 베서 장에 내다 팔지만 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다.

가끔씩 매파가 와서 중매를 서지만 혼수 흉내 낼 돈도 없어 한숨만 토하다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상에 법 없어도 살아갈 착한 박씨는 한평생 배운 것이라고는 나무 하는 것뿐인데, 요즘은 몸도 젊은 시절과 달라 나뭇짐도 점점 작아진다.

눈이 펄펄 오는 어느 날, 그는 지게에 도끼와 톱을 얹고 산으로 갔다. 화력 좋은 굴참나무를 찾아 헤매던 박씨는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새하얀 눈 위로 새빨간 산삼(山蔘) 열매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 아닌가. 산삼은 자그마치 일백년 묵은 동자삼(童子蔘)이었다.

박씨가 백년 묵은 산삼 한 뿌리를 캤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저잣거리의 약재상이 찾아왔다. “박서방! 산삼을 들고 주막으로 가세. 천석꾼 부자 황참봉이 기다리고 있네.” 박씨는 이끼로 싼 산삼을 보자기에 싸들고 약재상을 따라 저잣거리 주막으로 갔다. 황참봉과 그의 수하들이 술상을 차려놓고 박씨를 기다리고 주막을 제집처럼 여기는 놀음 꾼들, 껄렁패들도 산삼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마침내 박씨가 보자기를 풀자 일백년생 동자산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와~! 모두가 탄성을 지를 때 누군가 번개처럼 산삼을 낚아채더니, 쳐죽여도 시원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일백년 묵은 동자삼을 개뼈다귀 같은 노름꾼 놈이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것이 아닌가. 주막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참봉 수하들이 산삼도둑의 멱살을 잡아 올려보니, 폐병으로 콜록콜록 하는 놀음쟁이였다. 제대로 놀음판에 끼지도 못하고 뒷전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고리나 뜯는, 집도 절도 없는 젊은 놈팡이는 코피가 터지고 입술은 당나발처럼 부어오른 채 황참봉 수하들에 의해 방바닥에 구겨져 버렸다.

“이놈을 포박해서 우리 집으로 끌고 가렸다. 이놈의 배를 갈라 산삼을 끄집어낼 테다.” 황참봉의 일갈에 그는 사색이 되었다. 바로 그때 박씨가 나섰다. “참봉 어른, 아직까지 그의 뱃속에 있는 그 산삼은 제 것입니다요. 이놈의 배를 째든지 통째로 삶든지 제가 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황참봉은 할 말이 없어졌다.

박씨는 그를 데리고 나와 언덕마루에서 풀어줬다. 눈발 속으로 그가 사라진 후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박씨는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며 크게 한숨을 토했다. “그걸 팔아 딸애 시집보내려 했는데···. 배를 짼들 산삼이 멀쩡할까, 내 팔자에 웬 그런 복이···.”

3년 세월이 흐른 어느 봄날, 예나 다름없이 박씨가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와 집 마당으로 들어오니, 갓을 쓰고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이가 넙죽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소인 전에 산삼을 먹은 허골입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얼굴에 살이 오르고 어깨가 떡 벌어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허골은 산삼을 먹고 폐병이 완치돼 마포나루터에 진을 치고 장사판에 뛰어들어 거상(巨商)이 되었던 것이다. 꽃 피고 새 우는 화창한 봄날, 허골과 박씨 딸이 혼례를 올렸다. 박씨는 더 이상 나무지게를 지지 않고 대궐같은 기와집에 하인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용서와 베푸는 마음이 남는 장사 아닌가? 그렇다고 용서하고 베풀었다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 복을 지으면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면 오던 복도 달아난다. 복을 지으면서 칭찬을 받아버리면 그 복의 반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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