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혁개방 40년②] “주은래 죽음은 모택동 시대의 종말 예고”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중국대륙을 광풍으로 몰고간 문화혁명. 사진은 당시 군중집회 모습이다.

[아시아엔=이중 전 숭실대 총장]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을 이끌던, 중국혁명 전설의 주인공 세 사람이 시간을 다투어 이승을 뜨고 말았다. 하나의 시대를 마감하는 요란한 진동이었다. 진동은 지각변동으로 이어졌다.

그해 10월 6일, 이른 바 ‘4인방’으로 불리던 장칭(江靑) 등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예상하기 어려웠던 반전(反轉)이었다. 저우언라이의 황포군관학교 시절 이래 평생의 전우였던 예젠잉(葉劍英)이 4인방 타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치적 지각변동만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도 뒤따랐다. 7월 28일, 저우와 마오의 죽음 사이에 탕산(唐山)대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이 중국을 강타했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리고 다음 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하나의 새벽이 중국인에게 축복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의 작가 류야저우(劉亞洲)가 한 말이 있다. 그는 논픽션 <천안문>(天安門)(박재연 옮김. 동아일보사 발행)에서 저우언라이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아주 잘 간추렸다.

1976년 4월의 1차 천안문 사태의 본질과 원인을 간결하게 짚어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감정의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 저우언라이의 죽음은 너무나 때맞추어 일어났고, 그는 죽음으로써 인민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 되었다.

?저우의 죽음은, 문화혁명 10년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또한 마오쩌둥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일생동안 추구해온 이상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스스로 연 셈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물이었다. 물은 민심이다. 백성의 마음이다. 물이 흔들리면 배겨날 배가 없다. 산도 무너뜨린다. 그는 죽음으로써 물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영원할 것 같던 마오쩌둥이라는 거산도 서서히 무너지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곧바로 새 시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잔인하게도 그 고비에 4월의 ‘천안문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심은 요동치고 있었다. 류야저우 작가가 말한 ‘감정의 분출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비극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느새 날이 환히 밝아왔다. 광장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붐비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조상의 산소를 찾아 명복을 비는 청명절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에게는 무덤이 없었다. 여기가 바로 그의 무덤이었다. 얼마나 웅장한 무덤인가! 모두들 인산인해라고 했다…그야말로 천천히 흐르다가는 뭉치고, 뭉쳤다가는 흩어지는 구름 그 자체였다.

류야저우의 글이다. 1976년 4월의 ‘천안문 사태’를 이토록 문학적으로 표현한 글은 보기 힘들다. 천안문 광장을 가리켜 “여기가 바로 그의 무덤이었다.”는 표현은 압권이다. 인간이 토할 수 있는 최고의 절규가 아닐까.

저우언라이의 죽음에 대한 시적인 애도의 글 하나를 더 소개한다. 당시의 상황과 중국인들의 마음이 아주 잘 응축되어 있다.?

모두들 흐느끼며 슬픈 소식 알리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차마 말을 못하네.

人們 相告不成聲 欲言浿復垂

중국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저우언라이의 죽음에 대해 마오쩌둥이 보여준 비정함이었다.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국장으로 치러질 수도 있었다. 물론 저우언라이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가당치 않은 것이었고, 죽음과 관련된 그의 당부는 엄격했다. 그러나 본인이 죽고 난 뒤, 유언이나 유지를 받들고 안 받들고는 살아있는 자, 특히 절대 권력자의 영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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