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아사히’ 시베리아 억류자 관련 보도···‘73년 후 밝혀진 발자취’

<아시아엔>은 지난 15일 광복 73주년을 맞아 ‘광복절 73돌-구소련 강제억류’ 시리즈를 5회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이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은 물론 정부 역시 별다른 관심이 없는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 징병됐다 해방 직후 귀국 대신 소련에 억류돼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피해자가 1만명을 웃돌고 있습니다. 부친(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나서며 이 문제를 파헤치게 된 문용식씨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한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에 기요미즈 다이스케씨가 기고한 ‘시베리아에서의 최후, 73년 경과 후 밝혀진 억류자의 발자취’(シベリアでの最期、70年以上?て解明 抑留者の足跡は) 기사입니다. <편집자>

73년 전 2차대전은 끝났지만 종전을 맞이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구 만주(중국 동북부) 와 조선반도를 침공한?소련에 의해, 약 60만명의 일본병사들이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냉전 후 밝혀진 희생자의 수는 최소한 5만5천명.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금도, 육친의 ‘마지막 순간’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1946년 3월 6일 제944병원에서 사망’ ‘우에노 요후네지로’ 히로시마에 사는 아이하라 유미(79)씨 앞으로 후생노동성으로부터 한통의 봉투가 도착한 것은 작년 6월의 일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제공한 자료라고 써있었다. 귀환하고 수년 후에 들었던 아버지의 최후와는 달랐다. 아버지 우에노 요네지로씨는 만주에서 남만주철도 관련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일가는 봉천(현재 심양)에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1944년 육군에 소집되어, 종전 직후에 시베리아로 보내졌다고 한다.

7살이던 아이하라씨는 담배와 사탕을 팔러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첫째 남동생은 영양실조로 죽었다. 말라리아로 고생하다가 이듬해 1946년, 어머니, 둘째 남동생 등과 셋이서 귀환했다. 중학생 때, 아버지의 전우라는 분이 찾아왔다. 바이칼호 근처의 수용소에서, 벌목 작업 중에 쓰러진 나무에 깔린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이상 지나서 도착한 ‘병원에서 사망’이라는 통지서다. 22장의 러시아어 문서가 동봉돼 왔다. 손자의 동료에게 번역을 부탁해 보았더니, 병원진료기록카드였다. 요추골절, 수면불량, 식욕부진, 부정맥···. 그리고 ‘헛소리를 함’이라고 쓰여있다.

“가족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깝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차가운 땅에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34일 동안 극진히 간호받았던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냉전에 가로막힌 진상 규명

억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언제 어디서 죽었을까? 그에 대한 규명은 동서진영이 냉전으로 대립함으로써 오랫동안 금지되어 왔다. 유골수습과 명부제공이 시작된 것은,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1991년 4월 이후였다. 카르텔과 포로가 되었던 전후 상황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개인자료는, 2005년까지 3만8천명 분이 러시아로부터 후생성으로 인도되었다. 성명과 사망년월일을 기록한 명부는 지금도 계속 제공되고 있다.

후생성은 일본측의 자료와 대조함으로써, 억류사망자 5만 5천명 중 약 3만7천명의 유족에게 정보제공을 계속해 왔다. 단, 아이하라씨에게 자료가 도착한 것은 본인이 직접 후생성에 문의를 한 후였다. 2016년에 처음으로 억류에 의한 희생자를 추도하는 집회에 출석하여 신청을 촉구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하라씨는 “국가에는 육친의 최후를 어떻게든 성의껏 수습하길 바란다“고 간곡히 말한다.

식민지 피해자, 머나먼 기억

식민지 지배 피해자이면서 억류자가 된 사람들에게, 기억은 더욱 멀어져간다. “한국 안에서도 우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산에 사는 박정의(93)씨는 일본어로 말했다. 1944년 봄, 그는 일하기 위해서 갔던 구 만주에서 소집되었다. 배에 폭탄을 품고 소련군의 전차에 잠입하는 훈련을 받았다. 종전 후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수용소에 보내졌다. 영하 50도의 혹한에 통굽구두를 신고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식사는 검은 빵과 단무지 뿐이었다. 1948년 귀국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2년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휴전 후에는 군사독재정권이 계속되어, 소련과 국교를 체결한 1990년경까지는 “시베리아에서 귀환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억류체험자들과 ‘한국시베리아 삭풍회’를 결성. 1993년에 일본 체험자의 도움으로, 러시아부터 ‘노동증명서’ 발급을 받아냈다.

그는 ‘新井?雄’(아라이세유)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3년 4개월’ 수용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종전시 일본군에 의해 구만주로 동원되었던 한반도 출신자는 약 1만5천명, 적어도 3천명은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70명 정도가 사망했다. 이러한 기록을 찾아낸 건 삭풍회와 한국의 언론사다. 후생성은 이러한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쟁도 식민지 지배도 끝났는데, 우리를 ‘일본인’으로 시베리아에 보낸 일본. 그런데 사죄는 물론 종이 한 장 보내온 것이 없다.” 10년 전에 40명이던 삭풍회의 박정의씨의 동료는, 이제 한명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남겨진 우리는, 아니 국가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취재지원 정연옥 일본어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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