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억양 남았지만 특별한 경험”

평양서 한국어 배운 中 유학생 인터뷰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 유학생 9만 명 중 70%는 중국인이다. 그러나 중국 학생들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북한에 가서도 한국어를 배운다. 똑같은 한국말을 사용하고 거리도 가깝지만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가장 먼 곳, 북한.

북한의 평양 김형직사범대학에서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한국어 연수를 마치고 온 중국 학생들을 2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북경어언(語言)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가지항(賈志杭, 23살, 남)씨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23살 여학생 A씨, 그리고 이들과는 달리 한국 상명대학교에서 지난해 1년간 교환학생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정흔우(鄭欣宇, 23살, 여)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베이징 ‘우다우코역’ 부근 커피숍에서 만난 가지항 씨(왼쪽)와 정흔우 씨(오른쪽).

3학년인 가지항씨는 “북한에서 공부한 경험이 잊히지 않는다. 평양의 시설이나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이라고 말을 꺼냈다.

가지항씨와 A씨가 연수한 ‘김형직사범대학’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이름을 붙여 1948년 설립된 북한 최초의 사범대학이다. 지난해 중국은 북경어언대학과 북경제2외국어대학, 천진외국어대학, 사천외국어대학, 서안외국어대학 등 5개 학교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을 북한 김형직사범대학으로 연수 보냈다.

중국정부가 2달에 500달러씩을 지원하고, 북한은 1달에 40유로씩을 지원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북경대학을 포함한 5개 학교의 중국 학생 100여명이 연수를 받았다.

김형직사범대학 정문. 멀리 건물에 붙어있는 김일성 사진이 보인다.

가지항씨는 “조선어(한글) 강독과 문법, 회화, 조선역사를 다룬 문화사, 민족학, 지리 등을 배웠다. 강의는 하루에 2~3과목씩 있었고 체육시간에는 태권도와 농구, 배드민턴 등을 했다. 음악시간도 있고, 강의 수준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했다.

가씨는 몇 문장을 북한 억양으로 들려줬다. 한국어를 배웠지만 한국과는 다른 북한 억양으로 배운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사실 한국어를 하려면 남한에서 사용하는 말을 배워야 하는데, 북한 억양으로 배웠다. 다시 중국에 돌아와서는 이 억양을 피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평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북한과 중국이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 중국의 평양대사관에서 일하거나 무역일 등을 하고 싶다. 그때 되면 북한 억양을 말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 억양으로 한국어 구사, 친구 사귀기 어려워

-북한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나.
“외국인들끼리만 수업을 받았다. (상명대에서 공부한 정흔우씨처럼) 한국에 가서 유학했다면 한국 친구들과 공부도 같이 하고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많이 배웠을 텐데 북한은 사상도 다르고 얘기할 기회도 별로 없어서 한국어가 많이 늘지 않았다. 한국에서 연수 받은 친구들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다.”

기숙사 창문에서 본 평양 모습
대학생 노동모임

A씨의 경우 거의 기숙사에서만 생활했다고 했다. “북한 학생을 만나도 공부 얘기만 한다.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잠깐 전화하고 오겠다’는 등의 핑계를 대고 나가서는 안 들어온다. 중국 과자를 나눠줘도 잘 안 먹고, 외국인을 피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지하철에서도 아주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도망가더라. 아무래도 복장도 다르고 머리 모양도 다르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평양 지하철을 타봤나.
“지하철은 200미터 정도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야 탈 수 있다. 북한돈으로 500원 정도, 중국돈으로는 0.02위안(元) 정도다. 2호선이 있는데 길이는 길지 않고, 공기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다. 버스도 줄이 길더라.”

평양 지하철 역사 모습
2호선으로 된 평양 지하철 안내판 "어디로 가시렵니까?". ‘전승, 혁신, 건설, 황금별, 건국, 광복, 개선, 통일, 승리, 영광’ 등으로 적힌 역 이름이 보인다.

평양 시내서 사진 함부로 찍으면 안 돼, 백화점엔 수입품 즐비

-평양 시내를 구경했나.
“기숙사 밖을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아침이면 버스가 기숙사에 와서 학생들을 태워 학교로 가고 돌아올 때도 버스를 타고 기숙사에 온다. 밤 9시 이후에는 기숙사에서 나갈 수 없다. 가로등도 꺼진다. 하지만 수업이 없을 때는 시장에도 가봤고, 밤에 친구들과 평양의 야경을 본 적도 있다.”

유학생들은 함께 연수 했던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해줬다.

“다른 대학의 중국 유학생 3~4명이 평양의 한 시장에 가서 물건 파는 아주머니를 카메라로 찍었는데,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지웠다. 곧 평상복을 입은 경찰이 오더니 사진 찍은 학생을 어디론가 데려 갔다. 그때가 오후 3시쯤이었는데 밤 12시나 돼서 기숙사로 돌아온 그 친구는 심문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바닥을 뒹굴며 아픈 척을 해서야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중국대사관에서 이 일을 알고 기숙사에 찾아온 적도 있다.”

-평양 시내에서 사진 찍기는 어려웠겠다.
“좋은 것은 찍을 수 있지만 안 좋은 것은 못 찍게 했다. 시민들도 찍는 걸 보면 기분 안 좋아하면서 찍지 말라고 했다.”

평양의 교통경찰
거리를 청소하는 평양 시민들

-식사는 어떻게 했나.
“하루 3끼를 모두 기숙사 식당에서 먹었다. 양파, 콩나물, 닭고기 등이 나왔는데 유학생들 불만이 많아서 대사관에 얘기했더니 개선은 됐다. 그렇지만 백화점에서 독일산 쥬스, 동남아 과자와 사탕, 싱가포르 라면, 호주 우유 등을 사 먹었다. 대동강맥주와 북한소주도 사 먹어봤다.”

-백화점을 가봤나.
“좋은 물건은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보통 사람들은 시장을 이용한다. 과일은 중국보다 북한이 훨씬 비싸서 여름에 수박이 중국에서는 20위안(元)이라면 북한은 100위안(元) 정도였다. 좋은 상품은 인민폐, 달러, 유로 등을 받았고, 북한돈은 받지 않더라.”

-돈을 평양에 가져 왔나.
“달러와 중국돈을 가져 왔다. 어떤 친구는 양말에 넣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평양과 베이징 편지 교환 20~30일 걸려

-연수기간에 가족들과 연락은 어떻게 하나.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수거하고 7개월 뒤 귀국할 때 받았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은 안 되지만 편지는 쓸 수 있다. 편지 내용을 검사 당한 친구도 있다. 베이징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30일 정도 걸렸고, 받아보는 편지는 20일 정도 걸렸다.”

-전화는 못했나.
“베이징에 있는 부모님이나 여자친구에게 국제전화를 하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평양에 있는 호텔에 갔다. 고려호텔, 국제통신국, 장광원 등 3곳에서 전화를 할 수 있는데 1분에 12위안(元, 2000원) 정도로 비싸다.”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에서 보낸 중국 유학생들은 미리 노트북에 게임이나 드라마 등을 많이 가져 와서 틈날 때마다 봤다고 했다.

A씨는 “인터넷이 안 되니깐 가져온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뚫고 하이킥’ 등.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라는 영화도 봤다.”고 했다. 정흔우씨는 “한 친구는 부잣집으로 보이는 북한 학생 2명이 드라마를 달라고 해서 파일을 복사해주기도 했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가지항씨는 북한으로 연수 간 중국의 각 학교 유학생 대표 5명 중 한명으로 중국대사관에서 마련한 건국기념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 매주 2번 정도 대사관에 가서 TV도 보고 농구도 하고 과일도 먹었다고 했다. “북한TV는 채널이 3개였다. 중국 액션영화 ‘엽문’도 봤다. 전쟁과 혁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대부분이고 로맨틱한 현대적 드라마는 없었다.”

김정일 사망 석 달 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군인 열병식을 보았나.
9월9일에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은 멋있긴 하더라. 발을 딱딱 맞춰서 올리는 게 전체적으로 들썩들썩하는 것처럼 보였다. 50미터 앞에서 김정일과 김정은을 봤는데, 조선 사람들이 감격해서 우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가 김정일 사망 석 달 전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느릿느릿했고, 뒤에 있는 김정은은 어리고 살집이 있어 보였다.”

유학생들은 기숙사 건물을 비롯해 곳곳에 붙어 있는 ‘북한노동당’ 선전 플래카드가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기숙사 건물에 있는 걸린 문구 “장군님 따라 천만리”

-좋은 기억도 있지 않나.
“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새로운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또 송별회를 했는데 슬퍼서 눈물이 났다. 마음만 먹으면 평양에 와서 다시 볼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럴 기회도 없고 연락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후배들이 평양에 연수를 가게 되면 그때 선생님께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하는 것이 유일한 연락방법이다.”

김형직사범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가지항 씨

한국어를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은 북한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A씨는 요즘 ‘해품달’ 드라마를 챙겨 본다고 했고, 가지항씨는 남한에도 가보고 싶다며 한국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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