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와 자유언론②] 박정희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탄압

2010년 3월 17일 동아투위 3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장면.

[아시아엔=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동아일보> 해직기자, 전 국회의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동아일보 사주’ 측의 만행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 동아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자유언론의 기수들이 내쫓기던 1975년 3월 16일 자정 무렵부터 다음날인 17일 통금 후 새벽 4시부터 6시경까지의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16일 오후 9시경부터 동아 사주측은 보급소 직원들을 비롯한 깡패들을 동원(외신들은 사복 경찰관들도 동원되었다고 보도했다) 폭력으로 농성자들을 사옥 밖으로 내쫓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재야인사들과 야당 정치인들이 동아일보 사옥 앞 광화문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베레모를 쓴 거구의 천 선생이 다른 재야인사들 및 외신기자들과 함께 서계셨다. 윤보선 전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정일형·이태영 선생 부부도 함께 있었다.

그 분들의 응원을 지켜보던 우리들의 심경은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큰 위로와 격려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 농성자들은 통행금지 해제 직전 쇠파이프와 몽둥이와 산소 용접기를 든 깡패 폭도들에게 폭행당하면서 동아일보 사옥 밖으로 내쫓겼다. 밖에서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가 나와 준 천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외쳤다. “자유언론 만세!” “폭력축출 사과하라!” “자유언론 사수하자!”

그런데 며칠 뒤 사주측이 장악한 동아일보 격려광고 지면에는 해괴한 광고 한 개가 실렸다. “천관우씨, 여자 아나운서와 여관同宿” 대강 이런 낯 뜨겁고 야비한 내용이었다. 농성자들 걱정에 귀가하지 못하던 천 선생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16일 자정 가까워서 통금을 피해 세종로 부근 여관에 함께 투숙해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다시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쫓겨나오는 농성자들을 맞이한 것이 전말이었다.

농성장에 함께 있다가 농성자들의 먹꺼리를 사려고 외출했던 여자 아나운서 한현수씨가 봉쇄에 막혀 농성장에 합류하지 못하고 재야인사들과 함께 여관에서 지샌 것을 두고 동아일보 사주측은 그같은 저질 광고를 ‘자유언론을 격려하는 광고’에 섞어 내보냈다. 뒤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나서 권영자 문화부 차장이 위원장으로 선임되자 동아일보 사주측은 다시 격려광고 지면으로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 중이던 조선작 작가의 연재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빗대서 비방광고를 내기도 했다.

1975년 6월에 필자 자신이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9호, 국가모독죄(형법 104조 2항)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2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77년 12월말 출감해보니 아내는 불광동 전세 집에서 나와 여섯 차례의 이사 끝에 종로구 청운아파트로 옮겨 있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천 선생 댁을 들려서 밖의 사정을 전하고 당부 말씀도 들었다.

1978년 한여름, 찌는 듯한 날씨에 찾는 내방객도 없는 가운데 천 선생께서는 베잠방이 차림으로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다. 면도도, 머리칼 손질도 하지 않으셨다. 개다리 소반에 소주 두어 병과 맥주 글라스 그리고 된장 풋고추와 썰어놓은 오이 몇 개가 전부였다. 소주 한 병을 따르면 맥주잔 두 잔을 못 채웠다. 선생께서는 거의 말없이 들으셨고 내가 주로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