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英-아이슬란드, ‘대구’ 때문에 ‘아귀’ 다툼

2009년 한국 연예인 장자연 사망

고 장자연씨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편지

2009년 3월7일 한국의 모델 출신 여성 연예인 장자연(張子姸, 1980년1월25일생)씨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장씨는 CF 광고 모델로 데뷔했으며, 당시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던 중 자살했다.

자살 이후 전 매니저는 숨지기 직전에 쓴 자필문건을 공개했다. <장자연 문건>이라는 이 문건에는 장씨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서명 등이 적혀 있었다. 또 소속사인 더 컨텐츠 엔터테인먼트가 유력인사들에 대한 술 접대와 성(性)상납을 강요했고, 폭행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건에는 언론사 대표, 방송사 PD, 기업체 대표 등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예인 지망생들을 접대에 이용하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에 대한 인권 유린과 불법성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유서에 적혀진 유명 인사들의 실명에 대한 의혹이 커졌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국회에서 유서에 언급된 조선일보의 유력 관련자 실명을 공개, 조선일보는 즉각 반발하고 이를 공개한 KBS와 MBC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유력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조사가 끝난 뒤 검찰로 넘어 갔지만 수사대상자 20명중 7명만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구속됐던 사건 핵심인물인 소속사 대표 김성훈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문건을 세상에 알린 유장호는 모욕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었으나 기각됐다.

1996년 주일 미군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 대가는?

1996년 3월7일 12세 소녀를 성폭행한 주일 미군 병사 3명에 대해 미 군사법정은 6~7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와 관련, 오랜 기간 주일미군의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일본 내에서 유명한 <기지·군대를 허락하지 않는 행동하는 여자들의 모임(基地?軍隊を許さない行動する女たちの?)> 타카사토 스즈요 대표는 지난 2007년 한국의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형법상 강간죄에 대한 형벌이 너무 가벼워 범죄를 억제시키기에 역부족”이라고 비판했다.

12세 소녀 강간 사건은 1995년 오키나와 섬 미군기지 인근에서 발생했다. 사건 당시 12세 소녀는 3명의 미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가해자 미군 3명 중 2명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1명은 징역 6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판결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 중 한 명은 작년 8월 22세의 대학생을 강간하고 살인한 후,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9년 이란과 영국 가른 <악마의 시>

▲이란의 성난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면서 <악마의 시> 출판 금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9년 3월7일 이란은 샐먼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 문제로 영국과 단교를 결정했다. 이 소설에는 이슬람의 성인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함마드의 생애를 다룬 소설 <악마의 시>는 1988년 9월26일 영국에서 출판됐다. 이슬람 법학자 타바리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일찍이 메카 다신교의 신(神)을 인정하는 장귀를 읽어 내렸다고 하는 내용이 기록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무함마드는 이를 신의 예언이 아니라 악마의 농간이라고 해석했다. 이 책 원제의 악마가 바로 그 의미인데, 책에서는 내용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책은 이 밖에도 이슬람에 대한 야유로 해석될 소지가 많아 이슬람교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란의 이슬람 신성모독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과 이에 대한 영국 정부의 보호가 양국 단교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란의 이슬람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루시디에 대한 궐석 재판에서 저자 루시디와 책 발행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는 이슬람법의 해석인 ‘파트와(fatwa)’로 선고됐다. 영국 경찰은 그러나 저자 루시디를 엄중하게 보호했고, 이란은 결국 영국과 단교를 선언했던 것이다.

1976년 영국-아이슬란드 ‘입 큰 물고기’ 싸움

1976년 3월7일 북대서양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영국과 아이슬란드가 서로 발포, 전운이 고조됐다. 입 큰 물고기 포획을 둘러싼 이른 바 ‘대구(大口) 전쟁’이었다.

아이슬란드는 넉 달 전인 1975년 11월13일 “영국 트롤어선의 남획으로 대구가 고갈됐다”며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하고 곧바로 모든 외국 어선의 조업을 중단시켰다. 영국은 이에 맞서 구축함을 보내 자국 트롤어선 40척을 호위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슬란드 헬리콥터와 영국 전함 사이의 포격전도 일어났다. 아이슬란드는 급기야 1976년 2월19일 영국과 단교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주둔한 케플(Keflavik) 공군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이 공군기지는 당시 나토가 소련군의 침공을 예방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결국 UN과 나토의 중재로 두 나라는 1976년 6월 어업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협정 내용은 대부분 아이슬란드의 바람대로 이뤄졌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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