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70대 노부부의 ‘수채화 사랑’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오전 10시 집 나섰다. 한 20m 걷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무수한 꽃잎을 봤다. 길이 0.5mm나 될까. 이어지고 쌓여 꽃길이다.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에 이름표가 있다. ‘감나무’. 10년 넘게 지나다닌 곳 이제야 눈치 채다니. 그 꽃 감나무 꽃.

어릴 적 시골집에 석류나무 있었다. 선산에는 그야말로 아름드리 밤나무도 있었다. 갈 때마다 눈에 들어왔다. 유월 이맘 때 밤꽃 핀다.

감이나 밤이나 나뭇가지 맨 끝으로 피어나간다. 공중에 하늘거린다. 감나무와 밤나무는 같이 살지 않는다. 서로 따로 무리지어 살다가 같은 시기에 개화해 여름에 향기 날린다. 가벼운 냄새, 경쾌하게 만든다.

약속시간

오전 11시 10분. 버스 타고 성당 앞에서 내렸다. 점심모임이 12시, 11시반까지 가서 손님맞이 한다고 출발했었다. 아직 이르다. 10분이면 갈 거리, 일부러 둘러서 갔다. 인쇄소 기계 돌아가는 모양도 구경하고, 사진기 눈 휘둥그레 뜨며 들여다보고, 새로 지은 건물도 올려다보며 갔다.

길가에 인적 없다. 우산 신나게 앞뒤로 휘두르며 전진. 골목길 딱 돌아섰다.

오전 11시 30분. 대전 사는 을수가 벌써 와 저기 우산 들고 서 있다. 반갑다. 서로 손짓.

지각

나는 요즘 지각 많이 한다. 고교 동창생 ‘월례 짜장면 데이’에는 유일한 지각생이다. 계절 바뀌면 모이는 대학 때 불교회 멤버 점심엔 반 시간 늦었다. 정보2과 직원모임에도 그렇다.

원래 약속시간 전 10분 도착이 원칙이었다. 미리 좌정한다. 늦게 오는 사람은 당황한다.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은퇴한 지도 8년 넘었다. 그럴 필요 있냐, 좀 느긋해지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이 직행버스가 지각을 조장한다. 잘 됐다! 하며 지내는데···. 지난 번 중국집 만복림 점심엔 길 찾느라 늦었다. 많은 이 와서 앉아 있었다. 정작 일찍 와야 할 두 사람은 나보다 더 늦게 출현. 하기야 온다 해놓고 안 오는 사람보다야 나은 건 사실이다.

정오 조금 지났다. 온 사람끼리만 점심 시작. 보리굴비와 간장게장, 맛있었다. 밥집에서 주는 커피 마시고 또 커피 집 갔다.

오후 2시 24분. 한참 떠드는데 철성씨 전화 왔다. 멋지게 2년 하고 퇴임. 훌륭하다.

반찬을 사고

오후 4시 10분. 버스 타고 집 동네 도착, 집사람이 마중 나왔다.

슈퍼에 들러 백년짜장 만다복 한 봉지, 스팸 클래식 한 캔 샀다. 그 옆 반찬가게로 옮겨 우엉조림, 간장깻잎, 열무김치 사서 들었다.

집으로 가다가 벤치에서 휴식. 그때 막 길 건너가는 다람쥐 봤다. 올 들어 세번째라 했다. 기분 좋았다. 도착해 씻으니 더위 가신다.

오후 5시. 길고양이 세 마리 밥 주는 일과 완수. 오후 6시 21분 밥 앉히고 진공 포장된 육개장 뜯어서 끓인다.

오후 6시 46분 저녁 먹기 시작. 7시 23분 설거지 완료. 이건 모두 내몫이다. 물론 마누라님의 코치 하에 수행한다.

읽을 책 아직 많다

저녁 7시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신다. ‘BBC earth’와 ‘Nat Geo Wild’. 동물과 식물의 삶을 시청한다.

인간과 같은 탄생-병-치료와 회복-죽음의 스토리다. 원인 제공자는 인간. 오늘 주인공은 사람이 다리 분지른 고슴도치 새끼 세 마리.

문득 녀석들은 그걸 어떻게 기억하나? 언제 공부하나? 의문 생겼다. 옆에 앉아계신 코치님께 점잖게 문의.

태블릿으로 강다니엘에 열중하다가 “응? 별 거 아녀” 얼버무린다.

밤 8시 반. 서재로 간다. 이메일 체크. Yahoo Japan 통해 일본과 세계 뉴스 훑는다. 메모해 둔다.

밤 9시 ‘중팔통신’ 작성 시작. 메일로 발송할 준비 마친다. 이어 책 읽기.

자정 무렵. 독서 잠시 중지, 중팔통신 재검토 그리고 발송.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2004년 현직에서 물러날 때 영어와 일본어로 된 책 1000여권 다 읽고 죽자며 독파 개시. 필요한 부분은 자료로 정리, 다 읽으면 버린다.

2015년 11월 24일 490권 남았었다. 2017년 9월 13일 367권으로 줄어들었다.

책을 손에 쥐면 놓지를 못한다. 독서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부분까지 정독해야 이해된다. 참고자료는 카드에 기록한다.

요즘은 그것도 짐이다. 바로 컴퓨터 열고 타자 쳐서 파일에 저장한다. 필요할 때 자료 취합해 한편의 글로 만든다.

444

‘여기까지만 읽고 자자. 이 구절까지만 읽자’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마눌님 옆에 와서 “444”라 한다. ‘새벽 4시 44분’.

비로소 자러 간다. 기상시간은 오전 11시. 아침은? 얼굴 씻지도 않은 채 밥 앉힌다. 찌개 할까? 그냥 있는 반찬으로 먹자 한다. 근로시간 단축!

나이 일흔 셋,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말하기보다는 듣기만 하세요. 이 훈시. 분명히 새기고 나갔다. 내 얘기만 해댔다.

둘째, 한번 눈밖에 난 놈. 계속 혐오하고 배제하는 버릇 좀 없애라.

셋째, 빨래는 안하더라도 집 청소는 하기. 무선청소기 사다 놓은지가 언제냐.

넷째, History of Police 쓰기.

다섯째, 이 모든 것 다 그만두고 빈둥거리고 싶다. 그래서, 종종 중팔통신도 휴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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