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말뫼의 눈물’, 그건 아닌데···”어려운 사람 짓밟지 말라”


[아시아엔=황성혁 수필가, 황화상사 대표, 현대중공업 임원 역임] 1970년대 말 스웨덴의 말뫼(Malmoe)를 가끔 방문했다. 스웨덴 남서쪽 끝,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바다 건너 빤히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말뫼는 스웨덴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라곤 하지만 인구 30만이 안 되는 작은 도시였다.

그곳에는 세계 최고의 조선소 중 하나였던 코컴스(Kockums)가 군림하고 작은 선주들이 실속 있게 해운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해운회사들은 볼틱해 요지인 말뫼에 자리잡고 앉아 영업망을 확장하면서, 갓 장사를 시작한 한국의 조선소에 끊임없이 선박 건조 문의를 해왔다.

조선해운 시장의 중심축의 하나였던 코펜하겐 가는 길에 말뫼에 들러 그들과 선박 건조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때는 코펜하겐과 말뫼를 잇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어서 수중익선(Hydrofoil) 이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말뫼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항해였지만 배의 양쪽으로 물보라를 퉁기며 달리는 고속 수중익선을 탄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끊임없이 출발하는 여객선은 언제나 승객이 가득 찼었다. 바로 건너다보이는 이웃 마을이었지만 국경을 넘는 항해여서 배에 면세점을 열어놓고 있었다. 술에 대한 세금이 아주 높아 스웨덴이나 덴마크 사람들은 수중익선 타고 몇 병의 면세 위스키를 사오면 여비가 빠진다고 했었다.

말뫼의 가장 중요한 기업은 코컴스 조선소였다. 그 조선소가 가지고 있는 고가 이동형 기중기(高架 移動型 起重機)는 말뫼의 명물이었다. 세계 최대의 골리앗 크레인(Goliath Crane)이었다. 말뫼 어디서나 산보다 높은 초록색의 크레인이 까마득히 보였다.

중동전쟁과 석유파동의 여파로 7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초대형 유조선(VLCC)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세계 여러 곳에 VLCC를 지을 수 있는 대형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한국의 현대중공업이 탄생한 것도 1972년이었다. 코컴스의 골리앗 크레인도 그때 설치되었다. 그것은 대형 선박건조를 위한 필수장비였다.

한두번 코컴스 조선소를 방문했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서로 피 터지게 경쟁하면서도 넉살 좋게 방문하겠다고 알리면 스스럼없이 맞아 주었다. 나는 잘 정돈된 조선소를 보고 싶었고 그들은 온 세상을 요란하게 헤집고 다니는 개구쟁이같은 어린 조선소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조선소에 가면 감추는 것이 많았지만 그들은 조선소의 구석구석을 선선히 보여주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까불어 봐도 우리를 따라 올 수 없어” 그런 자세였다.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조선소가 70년대 자리를 잡으면서, 세계 조선업계는 전산 기술을 도입해서 조선생산에 적용한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80년대 들어서며 유럽의 조선소는 차례로 문을 닫았다. 영국 조선소들이 노조의 파업과 기술 도입의 지연으로 스스로 무너진 뒤에도 코컴스는 한동안 명맥을 유지했으나 결국 가격 경쟁력이 약해 80년대 중반 그들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말뫼의 자랑 골리앗 크레인은 천덕꾸러기가 되어갔다. 쓸데없는 철 구조물을 그대로 세워두자니 우선 보기가 흉하고, 허물어서 고철로 팔자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높이 328미터, 폭 165미터, 자체중량 7500톤의 거대한 철 구조물을 해체하는 작업은 세밀한 기술적 뒷받침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큰 돈이 드는 일이었다. 마침 한국의 현대중공업이 그 규모의 크레인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삼백억원을 들여 새로 만드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옮겨 가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선소가 문 닫은 뒤에도 말뫼는 크레인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고, 당장 뜯어 와서 설치해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겠다고 현대중공업은 판단했다. 말뫼로서는 횡재를 해도 큰 횡재를 한 셈이다. 해체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텐데, 현대가 와서 안전하게 해체를 한 뒤 말끔히 청소까지 해주었으니 큰 짐을 던 것이다. 현대중공업으로서도 잘 보존된 크레인을 제대로 해체한 뒤 배에 싣고 울산으로 가지고 와서 재조립을 하여 값지게 사용하게 되었으니 문자 그대로 서로 윈윈하는 게임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말뫼의 눈물’이란 괴담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명구에서 발췌한 것이기나 하듯, 조선소 문제만 나오면 ‘말뫼의 눈물’을 인용하는 것이다. 말뫼의 수많은 시민이 크레인의 해체 과정과 수송을 지켜보면서 슬픈 조선소의 종말을 애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선산업도 “너희들이 잘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고철 덩어리가 떠나는 것을 보며 몇몇 말뫼 시민들이 호기심으로 구경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조선소가 문을 닫은 뒤 20여년간 그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던 애물단지를 시간을 두고 조심조심 해체해서 처리해준 현대중공업에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환호작약은 했을지언정 떼를 지어 눈물을 흘렸다는 발상은 아무리 매스컴의 선동적 감상이라 하더라도 방향을 잘못 잡은 표현이었다. 말뫼의 눈물이라니!

‘말뫼의 눈물’은 통영에 붙이는 타이틀이 되었다. 번성하던 통영의 조선경기가 2008년 이후 급격히 쇠퇴했고 조선을 이끌던 삼호조선, 21세기조선, 신아조선 등이 문을 닫았으며 통영을 발판으로 삼았던 성동과 SPP조선이 함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통영 조선의 몰락이 말뫼의 코컴스조선소의 폐쇄와 비교되는 것이다.

통영은 아름다운 도시이다.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청정한 풍광, 맛깔나는 음식과 순박한 인심으로 유명했고, 수많은 시인, 묵객, 음악가를 배출한 예향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경제호황을 업고 통영의 전통적인 조선업계는 날아올랐다. 조용히 엎드려 있던 작은 조선소들이 부가가치 높은 중소형선들을 도맡아 건조할 정도로 통영은 세계에서 주목 받는 조선의 중심지가 되었다.

뛰어난 생산성과 새 기술에 대한 적응력으로 스스로를 축복받은 조선의 총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 통영을 가본 사람은 조선 산업이 통영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는 모습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소가 자리하고 있는 동네의 모든 벽은 조선소를 저주하는 대자보와 벽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즈음 외국인 선주와 함께 통영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당연히 의아해했다. 그 요란하고 살벌한 핏빛 플래카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조선소를 찬양하고 잘 되기를 기원하는 플래카드라고 설명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그가 속을 리 없었다. 그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소가 시내 민가와 붙어 있으니 민원이 없을 수 없지? 생계의 원천인 조선소를 주민들이 그렇게 들볶은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어느 때도 없었다. 조선소가 생긴 지 몇 십 년이 지나 조선소 주변에 정착한 사람들이, 조선소가 거기 있음으로써 그들의 생업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더했다.

시끄럽다, 먼지 난다, 페인트가 날린다, 온갖 떼를 쓰며 조선소의 경영진을 악덕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는 조선소를 폐쇄하라며, 이전하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다. 그나마 경기가 좋을 때는 명절마다 조선소 관리자들이 집집이 찾아다니며 값비싼 선물도 돌리고 비위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조선 경기가 고개를 숙이자, 그들이 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경영자는 물러났고 조선소는 문을 닫았다. 자기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떠나고, 구멍가게에 물건 사러 오던 조선소 식구들은 사라졌다. 이제 그 동네 사람들이 조선소를 다시 살려 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말뫼의 눈물’ 이라는 연극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내용은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서 농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조선소의 생존을 위한 첨단 생산장비인 골리앗 크레인이 조선소의 파멸과 연결될 수 있는, 갈등을 과장하는 농성의 도구로 묘사되다니···.

더구나 말뫼로부터 수십 일을 항해한 뒤 울산으로 시집 와서 또 수십 일을 들여 재조립된 고귀한 장비를 한낱 시위의 상징으로 전락시키다니. 그래서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며 한국 조선의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는 대표 조선소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것인가. 문학적 비유라 해도 좀더 격에 맞는 적절한 주제를 선택해야겠다.

“있을 때 잘해라. 떠난 뒤 후회하지 말고.” 후회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뫼의 사람들은 조선소를 저주한 적도, 조선소 사장을 매도한 적도 없다. 크레인을 보내며 감상의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코컴스가 번성할 때 그 풍요와 영광을 함께 누렸고, 어려워졌을 때 고통을 함께 나눴으며, 문을 닫아야 할 때가 왔을 때 결연히 문을 닫고, 시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끝장 토론을 통해 최첨단 기술대학을 코컴스조선소 자리에 세워 미래를 대비했다.

그들은 환경공학, 재생에너지, 의학, 바이오 육성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전 세계기업의 연구 인력의 거점이 되어 말뫼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유럽 최고 수준의 교육 도시로 우뚝 섰고 세계 방방곡곡으로부터 직장을 찾는 우수한 젊은이들의 종착지가 되고 있다. 그런데, 말뫼의 눈물이라니?

있을 때 잘해라. 잘나가는 사람 딴지 걸지 말고 어려운 사람 짓밟지 말아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 칭찬하고 잘난 사람 영웅으로 만들어라. 손에 든 소중한 것 잘 보아라. 우리의 땀과 피 그리고 눈물로 이룩한 것이다. 세상 어디서도 어느 때도 없었던 그 자랑스런 기적, 꼭꼭 지녀라.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려울 때 지녔던 무지개처럼 찬란했던 꿈 잊지 말아라. 그 꿈이 지녔던 가치를 잊지 말아라. 복된 세상 봄날 단비처럼 내리리니 그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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