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8주년②] 한강교 폭파 지시 ‘채병덕’ 참모총장···무능의 전형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6·25전쟁에서 초기에 기습남침을 당한 것은 북한군의 준비가 국군에 비해 크게 달랐던 점도 있으나, 채병덕 참모총장의 졸렬한 작전지도가 치명적이었다. 채병덕은 남침을 경고한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 정보국의 보고를 무시하고 비상을 해제하고 중기(重機)를 입고시켰다. 이에 대해 상당수 간부들은 채병덕이 통적분자(通敵分子)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6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유동열, 지청천, 김홍일, 김석원 등 군사경력자를 소집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이전을 위험시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결전을 주장했고, 이범석 전 총리와 김석원 장군도 한강 방어선 이외에는 승산이 없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에서 건의된 대로 했어야 하는데 채병덕은 후방에서 올라온 병력을 대대 단위로 축차 투입시켜 전력만 소진하고 전선은 붕괴되었다.

치명적인 것은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었던 한강철교의 폭파였다. 후에 실행을 맡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하고 이승만은 국민을 남겨두고 간 대통령으로 비난받았지만, 병력을 전방에 남겨둔 채 서둘러 폭파를 명령하고 후퇴한 채병덕이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한다.

정인보 등 수많은 국가적 인재들이 서울에 남겨졌다가 북한군에 납북되었다. 6월 28일 맥아더는 채병덕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맥아더가 보기에 채병덕의 답변은 ‘빵점’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에 즉각 채병덕을 해임할 것을 조언하였다. 6월 30일 이승만은 채병덕을 해임하고 미국에서 급히 돌아온 정일권으로 교체하였다.

채병덕도 딱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런 사람을 참모총장에 임명한 이승만의 인사가 문제였다. 채병덕은 이종찬과 일본 육사 49기 동기였다. 건군 과정에서 일본 육사 출신은 만주군이나 중국군 출신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일본 육사 출신 가운데 채병덕 같은 류가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그보다도 채병덕이 참모총장에 임명될 위인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본래 병기 소좌였다는 것이다. 전투병과가 아닌 병기병과 출신을 참모총장으로 앉힌 이승만은 군에 대한 상식이 너무도 부족한 문민 대통령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외교에 집중한 이승만은 외교에는 천재였으나, 군사에는 어두웠다.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국방장관 신성모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김홍일, 김석원 중에 누구라도 참모총장을 시켰더라면 초기의 어이없는 실패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북물자교류사건으로 1사단장 김석원과 채병덕 참모총장이 다투자 이승만은 김석원은 예편시키고 채병덕은 그대로 둔다. 강기(剛氣)의 김석원은 대통령에 대들다시피 하였다. 김석원이 중용되지 못한 것은 일본군 대좌로서 용명을 날렸던 김석원이 미군 고문관들에게는 버거웠던 때문이기도 하였다.

채병덕이 그 시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국가적 비극이었다. 통수권자로서 가장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는 국방부장관을 잘 고르고 그와 함께 군의 지휘부를 잘 구성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스벨트는 마샬을 참모총장으로 골랐고, 마샬은 아이젠하워 등 지휘부를 능숙하게 통어하였다. 통수권자로서 이승만의 비극은 부적절한 인사에 있었다.

채병덕의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조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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