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범죄칼럼] ‘호주의 딩고 사건’···”사람 피냐? 동물 피냐?”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인터폴 전 부총재] 1980년 여름 오스트레일리아 유명 관광휴양지 에어즈 록에 유난히 딩고 출몰이 잦았다. 6월에는 어린이들을 습격해 죽였다.

6월 23일. 유모차에 탄 어린 여자 아이를 물고 가려고 했다. 마침 아버지가 발견, 퇴치했다. 갈수록 대담해졌다. 관광객 야영텐트 속 식품을 훔쳐 달아나곤 했다.

8월 4일. 삼림경비대가 경고판을 여기저기 설치했다. 8월 15일 한밤중. 스미스의 텐트 속을 유유히 돌아다녔다. 에리카는 자다가 베개 뺏겼다. 8월 16일. 두 젊은 야영객이 물렸다.

아기를 물고 갔다

8월 17일. 체임벌린 일가가 왔다. 아버지와 엄마, 여자아기 아자리아를 비롯 아이들 셋이었다.

밤이 돼 아기는 잠들고 식구들은 옆 텐트로 마실 갔다. 이런저런 얘기하는 그때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들리는 듯 했다.

애기엄마 린디는 혹시나 해서 텐트로 달려갔다. 딩고가 뭘 물고 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가슴 철렁!

텐트를 잡아 제켰다. 아기가 없었다. 핏방울이 점 점 점 떨어져 있었다. “딩고다! 딩고! 딩고가 내 애기 물어갔다!”

30분도 안 돼 3백명의 수색대 출발. 덤불과 숲 빗질하듯 뒤졌다. 8월 22일. 피 묻은 아기 옷 점프슈트만 발견됐다.

소문 나르는 신문기사와 춤추는 경찰수사

신문과 방송은 그동안 딩고사고는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딩고는 들개로 겁 많다. 소리치면 도망간다”는 입장이었다.

에어즈 록에 출몰해 피해 입혀도 외면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딩고가 사람을 죽였다고 아자리아 사건을 보도했다.

뉴스는 이내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기엄마가 아이 학대했다. 침대 머리맡에 흰 관 놓고 잔다. 짐승에게 산 먹이 공양으로 줬다.” 마녀사냥하는 식이었다.

경찰은 아이 옷을 런던의 유명 법의학자에게 보냈다. 옷이 날카롭게 찢어져 있다. 딩고는 이렇게 못한다. 사람이 가위로 한 짓이라는 통보 받았다.

아버지의 차 대시보드 아래와 시트에서 나온 혈흔이 런던으로부터 사람 피라는 감정을 받았다.

사법의 허위와 시민의 진실 공방

1982년 9월 13일 재판 개시. 엄마 린디의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에 대한 경찰의 입증도 없었다. 그날 밤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고려하지 않았다.

옷은 린디가 가위로 잘랐다. 차 안의 피는 죽인 후 옮기다가 묻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갔다.

1982년 10월 28일. 유죄 평결. 평범한 시민들이 불복, 돕기에 나섰다.

1983년 11월 24일. 딩고의 이빨은 날카롭다. 가위로 자르듯 천을 자르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공개했다.

런던 전문가는 딩고가 뭔지도 모르면서 딩고 이빨 운운 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자동차 대시보드의 흔적은 같은 차종에는 다 있었다. 피가 아니었다. 제조공정에서 묻은 페인트임을 밝혀냈다. 저명한 학자는 피라 했고.

시트 속 혈흔은 체임벌린이 사는 동네 근처 구리광산의 먼지와 성분이 같음을 규명해냈다. 그 유명하다는 런던의 법의학자가 먼지와 피를 구별 못하다니.

학자들의 오만과 경찰의 편견

7년 투쟁. 그 동안 사인심문(死因審問) 2회와 항소 2회로 5톤의 서류가 쌓였다. 조사비용은 6백만 파운드.

1987년 6월. 면죄(免罪) 판결 받았다. 쟁쟁하다는 학자들의 오류 인정치 못하는 그릇된 고집, 경찰의 정직하지 못한 행태로 당한 고생이었다.

1992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무죄가 된 지 5년 지나서야 마지못해 실수 인정했다. 90만 오스트레일리아 달러의 보상금 지급했다. 아이는 끝내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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