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21세기형 선비’ 한승헌의 법조 55년 기념선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아시아엔=김혜원 인턴] 요즘 한국에는 지식이 넘쳐나고 대학진학률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최근 고졸취업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감안하더라도, 열에 여섯 이상은 대학에 간다. 거기에 유학길에 오르는 사람까지 셀 수 없이 많다. 높은 교육열과 고도의 학벌주의는 수많은 ‘지식인’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층이 일으킨 사건사고가 끝없이 들려오는 요즘,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대체 왜 지식인들이 이리도 ‘무지한’ 일을 벌이는 걸까?”

한국엔 똑똑한 ‘지식인’은 많지만, 참된 ‘지성인’은 드물기 때문이다. 똑똑한 그들은 자신에게 고생이 될 만한 일들은 걸러내고, 위로 올라갈 방법만 궁리한다. 나라가 바로 서고,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선 ‘사서 고생하는 지식인’이 앞장서 이끌어줘야 한다. 요즘 같은 때, 우리가 떠올리고, 본받을 분이 있다. 변호사 ‘한승헌’이다.

<피고인이 된 변호사>(종합출판 범우)는 그의 험난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한승헌은 한국이 독재정권으로 억압이 서슬 푸르던 시절, 양심수를 변호하고 불의한 시국에 맞서며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시대의 혼돈 속에 젊은 날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는 일제교육을 받고, 해방 후에는 좌우의 혼란을 겪었으며, 고등학교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휴전 후 나라가 피폐한 상황 속에서 겨우 대학을 다녔다.

자신도 추스르기 힘든 시기에 그는 약자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며, 양심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시대는 ‘오직 처벌만을 위한 의식으로 전락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재판의 공정성과 투명성은 형편 없었고, 시국사건에 손을 대는 변호사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는 일도 허다했다. 한승헌 역시 같은 이유로 두번이나 옥고를 치러야했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는 시국사건에 얽히며 여러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자랑스럽게는 못 살망정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는 것, 지식인의 도리는 다하지 못할지라도 학기(學妓)는 되지 말자는 것-이런 자계(自戒)는 여전히 유효하다. (39쪽, <동아일보> 1991.8.4자 기고)

“배우는 사람은 우선 많은 지식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나 아는 것을 바르게 써먹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앎과 함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의로운 일을 부단히 추구하는 그런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불의하고 부도덕한 일에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67쪽, 모교 <전북대신문> 1995.6. 기고)

한승헌 변호사는 품격 있는 유머의 ‘달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97년 대선으로 정권이 바뀐 뒤 몇분과 국정원장 공관에 초대된 적이 있다. 저녁 대접을 받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내가 이 회사에 여러번 불려왔지만 이렇게 지상에서 밥 얻어먹기는 처음입니다'(늘 지하실로 끌려가 거기서 밥을 먹었다)(346쪽)

이 책은 ‘변호사 한승헌’을 넘어 ‘인간 한승헌’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지식을 팔지 않고 세상에 베풀며, 고단한 속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삶으로 일관했음을 느낄 수 있다.

21세기형 선비상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휴머니즘과 유머적 감각을 놓치지 않고 넉넉한 일상을 물 흐르듯 이어가는 그의 모습이 바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인간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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