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청 경제칼럼] 잇단 갑질 대한항공 이끌 ‘청지기’ 어디 없소?

[아시아엔=엄길청 글로벌사회경영 평론가] 청지기(steward)는 타인이 맡긴 소중한 자산(물질, 행복, 안전, 생명 등)을 내 것 이상으로 잘 관리하고 보살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갖가지 은혜를 받은 직분을 가진 사람을 청지기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유럽의 왕실에는 집사장(lord high steward)이란 직책을 가진 고위관리가 왕가의 모든 것을 총괄 관리하였고, 귀족사회에는 집사라는 이름의 가사전문가들이 큰 집안의 자산은 물론 대소사를 맡아 관리했다,

오늘에 와서 다시 이 청지기가 등장하고 있다. 당초는 은행이나 보험회사들이 거액 자산가들의 개인자산 관리를 맡아주는 프라이빗 뱅킹 업무에 도입되기 시작했지만, 점차 이전처럼 가문의 가업경영, 자산관리, 자녀교육, 승계관리, 사회적 책임, 행복한 일상 등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 한국사회에서 불거지는 기업오너 일가의 이런저런 갑질 파문이 전통 있고 명예로운 성공한 가문을 지탱·유지시켜 준 가문 청지기들의 역할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있다. 자손의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남다른 노력으로 큰 자산을 물려주는 가문들은 자산유지와 가문발전 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사회적 책무나 과업을 전문가들이 맡아 보살펴주어야 한다.

지금 미국에는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라 불리는 가문자산 관리사업체들이 6000개 이상 있다. 보통 맡고 있는 자산이 1조원이 넘고, 이중에는 한 집안의 전속인 싱글패밀리오피스와 여러 집안을 동시에 돌보는 멀티플패밀리오피스가 있다.

록펠러 집안이나 유럽의 로스차일드 집안이 모두 패밀리오피스에 의해 긴 세월 후대에게 부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그들의 주된 사명은 그 가문이 대를 이어가면서 모두의 우호적 평판(reputation)속에서 부가 유지되어야 하는 책무가 가장 크다.

복지국가인 스웨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표적인 기업가 가문인 발렌베리 집안도 이제 6대로 가문이 넘어가지만 여러 전문가들이 후대들의 사회적 책임과 희생적인 헌신을 포함해 많은 의무와 역할을 관리하고 있다.

큰 부를 가진 후손들은 자신들이 평생 풍요로운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치러할 책무가 막중하다. 국가에 솔선하는 국민의 의무, 이웃에 대한 연민의 실천, 시민에게 귀감이 되는 품격 있는 삶의 자세, 존경받을 만한 높은 도덕성 등이 그들이 원하는 풍요로운 가족의 소망을 가져다준다.

우리나라 대기업도 일부 집안은 이제 어느 새 3-4대로 넘어가고 있다. 요즘 등장하는 몇몇 집안의 볼썽사나운 추문은 이젠 이런 집안들이 전문적인 패밀리오피스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오래전부터 대기업의 오너 일가 곁에는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 같은 정책부서가 있어서 가족들의 경영권(governance)을 관리해왔다. 하지만, 주로 권리의 보호나 가족들의 재무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일에 치중했기 때문에 올바른 자녀교육이나 사회적 책무를 돌보는 일은 소홀히 했다.

오늘날 한진가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다. 세상을 보는 지혜로움,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관대함, 미래를 보는 통찰, 여유로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와 근면함은 그 어떤 자산보다 소중한 마음의 청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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