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섹스④] 산업혁명 완숙기 접어든 19세기 영국의 민낯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1837년부터 1901년, 산업혁명이 완숙기에 진입했다. 세계로, 바다 저편으로, 영국깃발(Union Jack)을 앞세워 나갔다.

중산층이 형성되며 먹고 살만 했다. 물론 성에 대하여는 관심 없는 척하여 이상적인 여성상은 가정의 천사(angel of the home)로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남자나 여자나 정반대, 즉 욕망의 포로였다. 잘 사는 사람들은 그랬다.

하층계급의 실상

런던 밀벵크교도소에 수용된 창녀의 90%는 미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의 딸이었다. 그 딸들의 직업은 50%는 하녀, 50%는 파출부·세탁부·노점상이었다.

정상적인 직업인 의류제조, 점원, 공장직공, 농사꾼, 하녀조차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급여는 먹고 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부족한 생활비 해결방법은 매춘이었다. 집안생계 책임자(breadwinner)로 하사관 남편을 둔 부인은 남편의 급여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거리로 나가 몸을 팔아야 했다.

경찰단속은 런던에선 연간 9500명선, 지방에선 29500명선에 이르렀다. 단속 당하지 않은 수 포함하면 36만8000명선으로 여성의 직업 가운데 네 번째로 규모가 컸다.

무엇이 생겼는가

여성의 매춘으로 임질과 매독이 창궐했다. 크리미아전쟁은 이를 악화시켰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크리미아반도와 흑해에서 벌어진 이 전쟁으로 참전병사 셋 중 한 명이 성병에 걸려 귀국했다.

1862년, 전염병법(the Contagious Diseases Acts)이 나왔다. 군 주둔지와 해군이 있는 항구의 성병대책법이다. 매춘부는 등록하라 했다. 등록하면 귀잖게 했다. 수시로 성병검사 하러 왔다. 학교나 극장 같은 곳에는 출입금지.

부작용도 있었다. 동네 앙숙을 창부라고 고발하고 경쟁업자를 밀고했다. 경찰은 단속권을 빌미로 허름한 차림새의 여성은 창부라며 무조건 검문했다. 애꿎은 하층계급을 겨냥해 마구잡이로 검거해 의사에게 데려갔다.

부패의 만연

의사는 돈 주면 병 없다고 합격, 돈 안 주면 성병 보균자로 판정했다. 검사 기구는 불결했다. 오히려 병 전염시켰다. 원성이 자자해졌다.

경찰과 의사가 받은 돈은 판사에게 흘러들어 갔다. 뇌물 바치는 업자는 눈감아 줬다. 판사 앞에 끌려간 여성은 판사 쥐어줄 돈이 어디 있나. 감금병원(rock hospital)에 1년간 들어가야 했다.

이 병원은 일찌감치 식민지 인도에서 1797년 설립했다. 효과가 없었는데도 본국에서 도입했다. 전염병법 찬성단체들은 전국으로 단속지역을 확대하라고 했다.

하지만 사회운동가들은 이에 반대했다. “잡아가고, 검사하고, 감금하는 게 군인성병 예방책이냐. 그렇게 해도 성병은 여전하다”는 게 반대이유였다.

먹고 살 길 막연한 여성들은 일정 기간 감금됐다 나오면 어디로 가나? 복지정책(welfare-based solutions)이 필요하다고 했다. 먹고 살 여건 갖춰주워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1866년 법은 폐지됐다. 그러나 근본문제는 지금까지도 미해결 상태에 놓여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