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의 범죄사회학] 일본, 자국민도 미군에 위안부로 팔아넘겨

<사진=위키피디아>

비밀리에 추진하라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1945년 8월 18일 일본이 항복한 후 나흘째다. 내무성 경보국장(警保局長, 한국의 예전 내무부 치안국장)의 비밀 무선지령이 전국 경찰에 떨어졌다.

연합국 부대가 어디 주둔할지도 모르는 때였다. 그래도, 이런 곳 저런 곳에는 진주하지 않겠느냐는 예상 하에 내려진 지시였다.

제목은 “외국 주둔군 위안시설 등 정비요령”이었다. 내용은 일본 노동성 부인소년국의 매춘에 관한 조치였다.

“외국 주둔군에 대한 매춘영업행위는 일정한 구역에 한정시키고, 종래의 일본인 단속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구역은 경찰서장이 설정하며, 일본인의 출입은 금지한다. 경찰서장은 성적 위안시설, 음식시설, 오락장을 적극 지도하여 설비의 충실을 지급으로 도모한다.”

영업에 필요한 부녀자는 예기(藝妓, 기생), 공사창기(公私娼妓), 여급(女給, 호스티스), 작부(酌婦), 상습 매음여성(常習 賣淫女性)을 우선적으로 충족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딸들을 보호하라

말하자면 미군을 위한 위안소를 만들라는 것이다. 위안부는 기존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으로 하라. 그렇게 해서 외국 군인들이 우리 대일본 일반 여성의 정조를 범치 못하게 하라는 취지였다.

내각에서 이 일을 맡은 국무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도쿄 치안책임자인 경시청 경시총감 사카 노부요시(坂信彌)를 은밀히 불렀다.

그들은 일본군이 점령지 여성에게 저지른 잔혹한 짓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연합국 군인들이 일본여성을 강간하는 게 두려웠다.

“여보게. 노부요시 군. 일본의 딸들의 순결을 지켜주시게. 밑에 있는 부장에게 맡기지 말고 자네가 직접 선두에 서서 추진해 주시게.” 신신당부했다.

국무대신 지시를 받은 경시총감은 경시청으로 귀청하는 차 안에서 즉각 경찰서장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특수위안시설협회 결성

회의실에 도착한 그는 배경과 중요성을 설명했다. 비밀리에 완벽한 추진을 강조했다. 이어 업자 연석회의에 유곽, 위안소, 접대소, 요릿집, 유흥음식업, 기생협회 대표가 참석했다. 즉석에서 미군용 위안시설을 조속히 건설키로 결의했다.

특수위안시설협회(RAA,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를 추진기구로 만들었다. 천황이 사는 황궁 앞에 모인 업자들이 선언식을 개최하고 “천황 폐하의 은덕 잊지 않겠습니다. 일본의 딸들을 저희가 지키겠습니다”라며 다짐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미군은 공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군과 같은 위안소도 운영하지 않았다. 물론 장병 개개인이 사창에 가서 노는 건 막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위안시설을 만들었다.

8월 21일 대장성 주세국장(主稅局長)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나중에 수상에 오름)는 국고보조금 1억엔을 협회에 지원했다.

도쿄도에서는 콘돔 1만2천개를 긴급 조달했다. 경시청에서는 집기, 식기. 침구를 비롯해 필요한 물자를 수배해줬다.

국책사업 미군위안부 매춘

8월 22일, 제1호점 코마치엔(小町園)을 개설했다. 미군이 진주해 들어오는 길목인 도쿄 오오모리 해안가 일급 요정이었다. 그날로 미군을 받았다.

국가에서 하라고 하는데 포주들이 뒷짐 지고 있겠는가.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도쿄에만 25개 시설이 들어섰다.

오사카, 요코하마, 나고야 등 미군이 들어오는 항구와 하코네, 아타미 등 온천휴양지대 그리고 부대 있는 곳에는 어디건 빠짐없이 설치해 나갔다.

고급장교용, 일반사병용, 흑인용으로 구분해 운영했다. 여군용은 별도로 만들었다. 남자가 상대했다.

5만5천 여성이 국영매춘에 종사

여성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신문광고와 시내 번화가 광고판 보고 몰려들었다. “국가적 사업에 희생할 애국적 여성 급히 구함. 의식주 제공. 고수입 보장. 여비 지급.” 하루에 3백명이 응모했다.

미군은 이 시설 안의 비어 홀, 바, 카페, 카바레에 먼저 들렀다. 어울려 술 마시고 춤 췄다. 마음에 드는 여성 골라 침실로 향했다.

미군들이 Sex House라 부른 이곳에서 Serving Lady라 불리며 일했던 여성은 5만5천명에 이르렀다. 하루 30~50명의 미군병사에게 성을 서비스했다. 월수는 5만 엔.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였다.

양가 규수도 많았다

그녀들 대부분은 기존 매춘여성이 아니었다. 빚에 몰려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인데, 업주들이 놓아주겠는가. 저들 재산은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패전 후의 궁핍한 생활에 고귀한 신분이건, 미천한 계층이건 같이 겪었다. 몸 제대로 가릴 입성이 없었다. 더 꿂느냐, 덜 굶느냐 차이였다.

그런데 미군들이 초콜릿과 햄, 베이컨 막 나눠준다. 게다가 맛있는 미군 커피까지.

전쟁 때 여기저기서 鬼畜米英(귀축미영) 즉 “귀신과 짐승 같은 미국과 영국”이라더니···. 영 딴판이다. 미군은 천사다, 천사.

그런 미군 위해 일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전쟁에서 남편 잃은 미망인들, 아버지가 전사한 딸들은 더 살기 힘들었다. 이들이 몰려들었다. 좋은 집안의 딸들도 적지 않게 응모했다.

성병의 만연

1945년 9월 22일. 섹스 하우스 개설 1개월째, 연합군사령부는 일본정부 앞으로 ‘특별강조’ 공문을 보냈다.

“미군병사들이 매독과 임질로 고생한다. 花柳病(화류병) 대책 강구하라.”

도쿄도와 경시청은 긴급대책에 나섰다. 점령군사령부 말 안 듣고 배겨나나. 세세하게 규제했다.

패전 후 도쿄도의 첫 조례가 나왔다. “1주일에 1회 성병검진은 기본, 종사하는 여성의 성기를 매일 세정시켜라. 업주들은 철저히 이행하라”고 했다.

경시청과 미 헌병대이 무작정 젊은 여성을 검문해 병원에 데려갔다. 질 검사를 실시했다.

1946년 새해벽두 미군은 성병 발생시설에 대한 출입을 금지시켰다. “Off Limit” 입간판 세웠다. 미군 헌병과 경시청 경찰관이 경비 섰다.

7개월만에 미군위안소 폐쇄

1946년 2월 28일 성병은 확산되기만 했다. 급기야 모든 시설의 미군이용이 금지됐다. 3월 1일, 일본인 출입금지 시설은 일본인에게 문이 열렸다. 명칭은 ‘특수끽다점’(特殊 喫茶店) 특수 다방으로 변경토록 조치됐다.

이름은 차 마시는 가게, 실제로는 기생집(妓樓, 기루)이었다. 주변은 매춘가로 변모했다.

1945년 12월 31일 현재 일본에 주둔한 미군수는 43만287명. 몇명이나 이 Sex House의 Serving Lady와 어울렸을까.

종사했던 여성 5만5천명의 60%가 매독을 비롯한 성병으로 고생했다. 그녀들과 미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 GI Baby는 얼마나? 후생성에서는 4972명으로 잡았다. 미국 소설가 펄벅이 설립한 펄벅재단 조사로는 3만명에 이르렀다.

입안자 ‘국무대신’과 실행자 ‘경시총감’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의 대치로 서방은 공산권 포위망이 필요했다. 미군이 해외기지로 나갔다.

국경을 초월한 국제 군사사회 네트워크가 출현했다.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역사 속 군대행렬과 같다. 먹고 놀고 자고, 사고팔고···. 삶과 욕망도 부대 따라 이동한다. 국내화도, 세계화도 한다.

고노에 후미마로 국무대신과 사카 노부요시 경시총감이 의도한 목표는 일본여성의 순결 지키기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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