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⑦] 구소련 강제억류 피해자 모임 ‘삭풍회’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몇 차례에 걸쳐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2009년 10월 도교지방법원 앞에서 고 이병주 회장(왼쪽)이 일본의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삭풍회 6대 회장 고 이재섭씨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구소련 강제억류 피해자 모임 삭풍회를 이끌던 고 이병주 선생은 평양 출신으로 2011년 별세했다. 만주국 공무원으로 있다 1945년 8월초 입대해 시베리아 중부 크라스노 야르스크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제5대 회장을 맡는 동안 삭풍회 활동에 큰 획을 그었던 분이다. 1999년 일본 오부치게이조 총리 앞으로 피해배상 요청서도 보내고 일본 의회 의사당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참석해 한국인 억류문제 해결을 호소하였다.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인권소위원회 워킹그룹 회의에 참석해 한국인 소련억류 문제를 제기하고, 2003년엔 도쿄지방법원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억류피해배상 소송을 주도했던 분이다.

그분께선 “열흘만 늦게 입대했어도 한이 남지 않았을 것” 이라며 “전쟁터에 가지 않고 지옥같은 체험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되뇌이곤 하셨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더 이상은 한국 정부기관에서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좌절하며 막막한 지경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보관하던 부산일보 특집기사가 실린 신문을 꺼내 물끄러미 보던 중 ‘삭풍회’란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뜻하는 삭풍은 시베리아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돌아온 억류자들이 90년 한·소 수교 이후 알음알음 모여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며 만든 모임 이름이었다.

2006년 문득 삭풍회 어르신들을 만나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삭풍회를 어떻게 찾지? 삭풍회 기사를 보도한 기자는 오래 전 캐나다로 이민 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외교부는 알고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다행히 외교부는 삭풍회에 대해 알고 있었고 러시아과에 전화해 삭풍회 이병주 회장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인천 자택을 찾아가 큰 절을 드리고 찾아온 이유와 지참한 ‘조선인 소련군 포로명단’이 실린 신문을 보여드렸다. 이 회장님께선 포로명단을 살펴보신 후 회원들과 공유하고 함께 찾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신문 뭉치를 통째로 드리고 댁을 나왔다.

이후 이 회장께선 서울 종로의 한적한 다방에서 열리는 삭풍회 모임에 가자며 전화를 주셨고 나는 그를 따라 몇번인가 그곳 모임에 참석했다. 삭풍회 회원들은 정말 한이 많으셨던 분들이다.

이병주 회장께선 6.25전쟁에 국군장교로 참전해 무공훈장도 받았다.

2011년 이병주 회장이 별세하고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유가족은 보훈처에 국립묘지 안장을 신청했다. 그런데 보훈처는 접수 후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발인 전날이 되어서야 “과거 소련에서 3년간 체류한 사실이 문제가 돼 국립묘지 안장이 어렵다”는 연락을 주었다. 이후 유가족의 강력한 항의에 심사를 다시 하고 나서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실 수 있었다.

그 사이 유가족은 보훈처의 황당한 소식에 애간장을 태워야만 했다. 나는 당시 관련 보도와 유가족의 사정을 들으면서 과거 적성국 체류사실은 이미 60년이 지난 일인데 국가가 옹졸하게 대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은 도대체 국가에 무엇이란 말인가?

보훈처는 1949년 2월 시베리아 억류자들이 38선을 넘어올 때 체포해 인천 송월동 수용소로 압송하고 그곳에 있는 동안 조사한 결과를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결국 유가족의 항의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셨지만 소련에서의 억류 사실은 60년이 지나서도 어느 순간 유령처럼 나타나 한 많은 망자의 저승길까지 따라와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가 그토록 찾고자 애썼던 아버지 기록이 국가기관 어디선가 몰래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웠다. 하지만 그들은 무슨 연유에선지 감추기에 급급했다. 국가란 국민에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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