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농부 박영옥의 돈 생각④] “10만원도 좋다. 주식계좌 개설부터”

“당신은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을 하시겠습니까?” “욕망이 앞서는 사람은 요행수를 바라면서 불평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의지를 가진 사람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주식농부’로 잘 알려진 박영옥 스마트인컴 대표가 늘 던지는 질문이다. 기업의 가치에 투자하는 ‘농심투자법’으로 연 50% 이상의 투자수익을 거두며 ‘주식농부’로 널리 알려진 박영옥 대표가 <아시아엔>에 글을 연재한다. 그는 “주식이 아닌 기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행복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며 “농부가 볍씨를 고르듯 좋은 기업을 골라 투자한 뒤 성과를 공유하라”고 말한다. <편집자>

[아시아엔=박영옥<주식, 투자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얘야, 너는 기업의 주인이다> <주식, 농부처럼 투자하라> 저자, 스마트인컴 대표이사] 사람들은 필자를 부자라 부른다. 언론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나도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물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은 없다. 어릴 때 워낙 가난하게 자라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향이 그래서인지, 남들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별 취미가 없고 좋아하는 것들도 대체로 소박하다. 그래서 큰돈을 지출할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돈으로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쓴다.

“부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자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하는 질문과 상통한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부자이고, 그게 부자가 돼서 좋은 점”이라고.

“어떻게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년 지기 친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자. 친구들 중 누구는 치료비에 보태쓰라고 200만원을 줬고 또 다른 누군가는 100만원을 줬다. 액수가 두배 차이가 나므로 우정의 크기도 두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아니다! 내가 말하는 비교 대상은 친구가 병원비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이만큼은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 금액과 실제로 건네주는 돈의 액수다. 결혼식 축의금이나 조의금 등 돈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부자가 아닐 때는 ‘이만큼’에 비해 부족할 때가 많았다. ‘돈의 검열’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검열 과정 없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낼 수 있어서 좋다.

‘재벌닷컴’ 발표에 따르면 필자는 2013년 대한민국 400대 부자에 들었다고 한다. 정확한 등수가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주가는 늘 변하니까 등수가 나왔다 해도 별 의미는 없다. 그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더욱 그렇다.

전라북도 장수, 그 시골에서 우리 집은 ‘한 끗’ 더 가난한 집이었다. 마을의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어 전기도 더 늦게 들어왔다. 그런 곳에서 고무신 신고 상경해 섬유가공 공장, 신문팔이, 방송통신고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다행히 대학부터는 비교적 수월하게 살았다. 4년 전액 장학금에 매월 10만원의 보조까지 받았다. 1997년 서른일곱 나이에 교보증권 압구정지점장을 맡기까지 큰 굴곡없이 살았다.

그런데 1997년 말에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 1988년에 취업했으니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살림까지 알뜰살뜰하게 했던 아내와 나는 주식투자로 얻은 수익금을 차곡차곡 모으며 자산을 불려나갔다. 두 딸과 아내, 우리 가족은 어머니 명의로 사드린 집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대로만 가면 큰 부자는 아니어도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1997년 국가적 재앙이 터졌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재앙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가정을 덮쳤다. 우리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객들에게 냉정하게 대응했다면 찰과상 정도의 피해만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권유에 따라 투자했다가 손해 본 고객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제가 권유는 했지만 최종 결정은 고객님이 하셨잖아요”라는 말로 책임을 피해가지 않았다. 나는 대신 내 재산으로 고객들의 손실을 보전해주었다. 어머니께 사드렸던 집도 팔았다. 탈탈 털고 나니 사글세를 얻을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1998년초의 내 자산 상태였다. 이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했고 주식투자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제로에서 조금씩 자산을 불려 나가던 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2001년 9·11 테러가 그것이다. 나는 그때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투자자로 나섰다. 단기간에 폭락한 주식들을 매수했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큰 수익으로 돌아왔다. 사글세를 살던 처지에서 400대 부자가 되기까지 약 15년 정도 걸린 셈이다.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투자와 시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다. 나는 <아시아엔> 독자들의 종잣돈이 얼마인지 모른다.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는 돈은 몇 십만원에 불과할 수도 있고 몇 백만원일 수도 있다. 하룻밤 마음 놓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한 열흘 해외여행 한번 편안하게 다녀오면 없어지는 ‘소소한 액수’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돈에 ‘종자’라는 단어를 붙이면 가치가 달라진다. 종자라는 게 원래 그렇다. 볍씨 한 알을 심어 열매를 추수하고 그것을 다시 뿌리기를 반복하면 몇년 지나지 않아 곳간을 채울 곡식으로 불어난다. ‘종자’와 ‘시간’과 ‘노력’이 이 기적의 원천이다. 낯 뜨거운 자랑을 길게 한 것도 독자들께 이 기적을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기적의 시작은 의외로 쉽다. 당장 주식 계좌를 개설하고 단돈 10만원이라도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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