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정변’···새해 벽두 ‘정변’이라 하니 섬뜩하겠으나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새해 아침에 정변이라고 하니 모두 가슴이 섬뜩하겠지만, 우리의 현재가 아니고 중국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1889년 청에서 서태후(西太后)가 광서제(光緖帝)를 유폐한 정변이 일어났다. 중국 역사에서 황제의 권력을 누린 태후는 셋이다.

첫째는 漢 고조를 도와 천하를 잡은 여태후다. 둘째는 唐 태종의 후궁이었으나 나중 황제에까지 올랐던 측천무후다. 세번째가 淸의 서태후다. 서태후는 세살의 부의(溥儀)를 황제로 세웠는데 북청사변에서 북경이 실함되자 西安으로 도주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서태후가 해군 건설자금을 빼돌려 만든 원명원(圓明園)을 약탈하고 갖은 보물을 빼돌렸다.

태평양의 섬나라 팔라우가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라는 중국의 요구에 발끈했다. 팔라우 소득의 절반이 관광 수입이고 그 반은 중국 관광객이 차지한다는데 중국을 거부한다니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대만과의 국교는 국가의 주권행위로 중국이 용훼할 일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니 의기가 대단하다. 미국 태평양함대가 현재(懸在)하는 팔라우에 중화사상(中華思想)은 해괴무비(駭怪無比)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달라이 라마 초청을 추진하는 불교계 민간단체가 있다고 하니 그나마 기특하다고 할까?

고려의 통일은 주로 선양(禪讓)에 의한 것이었다. 왕건은 궁예에 실망한 부하의 추대를 받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도 견훤의 투항과 경순왕의 귀부(歸附)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시작된 왕조다. 고려의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 한민족은 만주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는 송과 요를 저울질하며 자주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로부터 시작했다. 인조가 청 태종에 삼궤구고(三?九叩)한 것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누대(累代)로 한족이 세운 명의 황제에 대해서도 했던 일이다.

여진족에 당한 일은 참을 수 없고, 한족이 한 일은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이야말로 사대근성이다.

앞으로 남북통일도 경순왕이 귀부한 것처럼 북한 집권층이 한국에 귀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보기관은 이런 공작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 시절 황장엽의 귀순은 이를 가늠할 수 있고,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김대중 시대로 이어지면서 딴판으로 갔다. 오히려 황장엽의 돌연한 죽음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소위 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인물이 남행을 결행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자살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진실이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남북통일은 유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널리 지혜를 찾아야 한다. 전 국민이 제대로 역사공부를 해야 한다. 일제의 역사조작만이 아니고 송 나라의 쌍기와 고려 김부식의 기록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남아 있는 기록에만 의존하다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환원이 불가능하다.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써진 <삼국사기>가 삼국사의 근거가 된단 말인가? 기독교와 유태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이 내세우는 모세도 역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백과사전에 모세의 정확한 生沒年度가 나오지 않는 이유다.

역사는 방법론에 때라 진화한다. 탄소연대 측정법이 생기기 前과 後의 考古學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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