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누굴 위해 장진호 전투에서 희생됐나?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세밑을 앞두고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서울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려도 시민들이 모두 움츠러든다. 전방 철원에서 영하 10도는 보통이다. 연천에서 포대전개훈련을 하는데 영하 10도가 되고 허허벌판 진지에 바람까지 몰아치니 숨 쉬기도 힘들던 체험이 있다. 군인들에게는 동장군이 그냥 말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되면? 1950년 11월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당했던 실화다. 이 가운데 미국 1해병사단과 중공군 4개 사단이 격돌한 전투가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그랑 따르메와 1941년 히틀러의 독일군이 당했던 참화의 재현이었다.

놀라운 것은 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통솔력이다.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악전고투하던 사단장은 11월 27일 후퇴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후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해병대 교범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미스 장군은 적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돌파를 위하여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방향이 후방이었을 따름이다. 스미스 장군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 해병대의 철수를 막기 위해 송시륜(宋時倫) 중공군 8병단 사령원은 앞의 4개 사단 외에 5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전진(轉進)하여 하갈우리에 이르자 교량이 폭파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미스 장군은 공군에 다리를 투하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수송기로 40톤에 달하는 M-2 조립교를 낙하하여 1만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건널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작전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미군 밖에 없다.

후방으로의 전진(轉進)은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대부분이 동상환자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형편이었다. 그 혹한 속에서 후퇴하면서도 이를 증언하는 세세한 사진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놀랍다. 이것은 난관 속에서도 각 부서가 모두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부에서 해병1사단이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서부에서는 미 육군 2사단이 ‘인디안 태형’을 당했다.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 이 상황을 접하는 맥아더 원수도 거의 공황상태였다. 그러나 해병대만이 스미스 장군의 통솔로 이 절망적 상황을 가까스로 벗어났다.

해병대 손실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이었으나 중공군은 전사 2500, 부상 1만2500명에 이르렀다. 1해병사단이 중공군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유엔군은 체계적으로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1해병사단에 이어, 미7보병사단, 국군 수도사단, 미3보병사단과 차량 1만7000대, 탄약 9000톤 등 35만톤의 장비를 철수하였다.

흥남 철수를 통해 10만의 피난민이 북한을 벗어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넘어온 부모 가운데서 태어났다. 탱크와 대포를 모두 내려놓고 1만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한 빅토리아호 선장과 10군단 통역 현봉학은 영화 <국제시장>에 그려져 있고,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흥남 철수작전을 엄호한 김백일 장군의 공훈도 잊을 수 없다.

동장군 속에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한국사람들’을 위한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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