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 21] 중국 ‘우정배’ 스폰서 하며 만난 ‘좌’와 ‘푸양’과의 인연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주인공, 강원관광대 명예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프로갬블러인 필자는 사실 바둑에 더 흥미와 소질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전편에서도 소개했지만 중국 바둑의 국제화에도 나름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번 호부터 4차례에 걸쳐 중국 바둑에 대해 연속해 소개하려 한다.

1993년 나는 중국의 낙후되어 있는 기전시스템에 대하여 강주구 9단과 의논을 많이 했다. 그 결과 한국처럼 20%의 주관료로 떼는 기전(棋戰)의 스폰서를 중국에 찾아주기로 하였다.

당시 중국기원에서 주최하는 기전은 세금과 중국기원이 대회장 사용료 등의 명분으로 90%를 떼어가기 때문에 대국료나 상금액수가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나는 아시아나항공에서 ‘아시아나항공배’를 열어주면 여러 면에서 윈윈 할 수 있을 거라 보고 공을 들였다. 그런데 거의 합의가 나올 시점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중국 항공사의 비행기는 텅텅 비어 다니는데 한국 비행기만 사람이 많으니 중국이 1인당 100달러의 세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시아나에서는 스폰서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중간에서 곤란해지게 되었다. 중국기원 진조덕 원장이 내게 말했다. “그동안의 과정이나 차민수 선생 수고를 너무 잘 압니다. 그만 없던 일로 합시다.” 하지만 나는 중국의 바둑이 성장해야 앞으로 세계바둑계가 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다니며 매년 가파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 원장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중국인의 친구로서 자비로 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광고를 할 회사도 없으니 대회 명칭은 ‘친구배’로 하지요.”

진조덕 원장은 ‘친구’보다는 ‘우정’이란 말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진 원장 조언을 받아들여 ‘우정배’(Friendship Cup)로 명명하여 1994년부터 3년 계약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3년간의 계약이 끝나고 1997년 3년을 더 연장하려는 순간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다. 한국기사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얘기도 들렸다. “한국도 힘든데 왜 하필 중국만 도와주냐”는 것이다.

나와 절친한 친구이자 중앙일보 해설위원으로 있는 박치문 위원이 “우정배를 이쯤에서 그만 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말대로 우정배는 3년으로 끝내고 말았지만 중국기사들은 나를 하늘 같이 여긴다. 자기들은 조금의 불평도 할 수 없던 터였는데 미국에 사는 프로기사인 내가 스폰서를 자청하여 기전의 체제를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란다.

우정배로 인하여 중국의 기전방식이 한국식으로 바뀌게 되며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우정배 대회 기간 중국방문 중에 토니의 소개로 만난 친구 중에는 바둑을 좋아하는 좌라는 친구와 그의 절친 푸양이 있었다. 좌는 그룹회장의 명함을 내게 주었는데 집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통역에게 집단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우리말로 그룹이란다.

나하고는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친구가 그룹의 회장이라니 나는 의아해 하였다. 사연인 즉 그의 아버지는 북경시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북경의 땅을 분할하여 판매할 당시 분할담당 책임자였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북경 도심에 호텔과 건물을 여럿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우정배 개최 때에는 해마다 그의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차민수 교수(왼쪽 세번째)가 좌(왼쪽 끝), 푸양(오른쪽 두번째) 그리고 이들을 소개해준 토니(맨 오른쪽)와 나란히 서있다. 1995년쯤 북경오리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체격이 무척이나 컸다. 좌의 친구인 푸양은 법무법인을 하고 있는 변호사였다. 중국의 변호사는 직급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사건의 범위가 달랐다. 북경에서 법무법인을 경영하던 그에게 충칭에서 큰 사건 하나가 들어왔다. 충칭 시 당서기장인 보시라이가 누군가를 없앨 목적으로 구속시킨 일이 있었다.

푸양은 수하 변호사를 파견하여 그 재판을 무죄를 받아내며 승소했다. 이에 화가 난 보시라이가 그의 변호사를 구속시켜 버렸다.

푸양은 “같은 태자당끼리 그러면 되겠느냐”고 구슬러도 보았지만 보시라이는 들은 척도 안하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본시 보시라이는 몽고계 태자당으로 문화혁명 당시 자신의 부친의 목을 밟고 비판하였던 인물이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크게 될 인물이라 나를 밟고 지나가도 된다고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푸양은 할 수없이 시진핑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시진핑이 직접 전화를 걸어 중재에 나서자 변호사는 풀려나고 사건은 해결되었다.

이 일은 장차 보시라이 실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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