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45] 진의 천하통일은 축복 또는 저주?

영정왕, 연과 제나라까지 초토화시켜 천하통일 이루다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진의 대장군 왕전의 군대가 연나라로 가는 길, 석산(錫山)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병사들이 밥솥을 묻으려 땅을 파던 중 오래된 비석을 하나 발견했는데, 비석에는 “주석이 날 때는 천하 병사들이 몰려들어 다투고, 주석이 나지 않게 되면 천하가 맑아진다”(有錫兵, 天下爭, 無錫寧, 天下?)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전은 “이 비석이 나타났으니 이제부터 천하는 평온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연나라는 고조선과 관계가 깊은 나라이다. 까마득한 옛날 고조선 다음의 위만조선 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사진=위키피디아>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위만이 망명하여 1천여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의복을 입고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서기전 108년 여름,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땅인 요서 지역에 한사군(현도군·진번군·임둔군·낙랑군)을 설치하여 위만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논쟁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한나라가 한사군을 두고 지배한 지역이 어느 곳인가 하는 거다. 광활한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요서의 위만조선이라는 설, 요동과 한반도에는 고조선이 그대로 있었고, 잃었던 요서 지역의 고조선 땅은 나중에 고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가 되찾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연나라가 늦게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연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먼 곳 동북 끝자락의 요동 땅에 자리하고 있었고, 조나 초 등과 같은 강대국을 먼저 치기위해서 연까지 영정왕의 눈길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연태자 단의 영정 암살기도 사건이 벌어졌고, 어차피 천하통일의 길이었기에, 조나라를 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군대는 요동지역 연나라 국경 부근까지 이르렀다. 이에 연나라 왕 희(喜)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연나라 태자 단(丹)은 이미 형가와 함께 진왕 암살기도 사건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수세에 몰려 있었다.

영정왕 22년(기원전 226년), 그는 대장군 왕전(王?)과 왕분(王賁) 부자에게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 수도 계(?·오늘날의 베이징)를 치도록 명령했다. 연나라 왕 희는 태자 단과 함께 요동군으로 피난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연태자 단을 연수(衍水)까지 몰아갔다. 태자 단은 물속에 잠수,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 연나라 왕 희는 태자 단을 죽여 그 머리를 진나라에 바침으로써 휴전을 제휴하여 연나라를 보전하고자 했다.

연나라 왕 희가 요동 끝으로 피신한 이후 진나라 군대의 주력 부대는 남부 전선으로 이동, 초나라를 공격했다. 남방에서 초나라 대군을 물리친 후 승세를 이어 월나라 군주를 항복시키고 회계군을 설치했다.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왕분은 영정왕 25년(기원전 222년) 요동으로 추격하여 연나라를 짓밟았다. 왕분 장군이 연왕 희를 포로로 잡으니,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장강 유역은 전부 진나라에 편입됐다.

이제 6국 가운데 남은 나라는 강태공의 전통의 예의지국 제나라 하나뿐이었다. 영정 26년(기원전 221년), 영정은 왕분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 전국 6국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제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제나라는 특별한 나라였다. 춘추전국시대 500여년을 통틀어 모든 제후국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더였다.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나라는 산둥(山東)반도의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였다. 그러나 기원전 284년 연, 조, 한, 위, 초나라 5개국이 합종하여 제나라를 공격했고, 특히 전국시대의 명장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서 제나라는 멸망의 위기를 겨우 모면했던 일이 있다. 이후로도 제나라는 이전의 강성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제나라 왕이었던 건(建)은 한심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진나라의 역전의 명장 왕분이 여세를 몰아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 산동 임치)까지 쳐들어가 제의하길, 만약 항복을 하면 500리의 땅을 주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자손들을 길이 보전하게 해주겠다며 제왕을 회유했다. 그러나 제왕이 항복하자 약속은 간데 없고 즉각 그 왕을 하남의 공(共) 땅으로 추방하여 산속에서 굶어 죽게 했다.

제나라까지 멸망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천하의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마지막 단계를 완수했다. 영정왕 26년(BC221), 이렇게 천하통일이 이루어졌다!

장강은 굽이쳤고, 태산이 요동쳤다.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政)은 500여년간 대치했던 여섯 나라를 완전히 멸하고 全 중국을 통일하여 역사상 첫번째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인 통일 진(秦) 왕조를 세웠다. 전국 초부터 무려 250년 이상을 버텨 오던 6국이 진왕 정이 기치를 들자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멸망한 연대를 정리하면 한(韓, BC230), 조(趙, BC228), 위(魏, BC225), 초(楚, BC223), 연(燕, BC222), 제(齊, BC221) 순이다.

사가들은 탄식했다. 그들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위업보다는 이를 막지 못하고 처절하게 패망당한 한심한 6국의 왕들과 인사들에게 통렬하게 탄핵하는 글들을 보냈다. 저 6국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지키지 못하고 진의 강대한 무력과 부국강병의 법가정책에 무기력하게 짓밟힌 저들에게 위로는커녕 준엄한 질책을 가했다. 그들은 진나라를 축복하지 않았다. 오직 부국강병 법가적 정책으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나라의 철권정치를 탄핵했으며, 동시에 나머지 육국의 한심하고 무능한 정치를 비웃었다.

그렇다. 진의 천하통일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에 가까웠다. 사마천은 <사기>의 ‘육국세가(六國世家)’에서 진나라의 5배나 되는 땅과 10배나 되는 군사를 가지고도 오히려 진에게 멸망당한 당시의 제후들에게 육국 멸망의 책임을 돌렸다. 당(唐)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아방궁부(阿房宮賦)’에서 육국을 멸망하게 한 것은 진나라가 아니라 육국 자신들이었다고 탄핵하며 통탄했다.

특히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송(宋)나라의 소철(蘇轍)의 탄핵이 유명한데, 그는 ‘육국론(六國論)’에서 천하의 대세와 판도를 읽지 못한 당시의 인사들에게 육국 멸망의 죄과를 준엄하게 물었다. 소철은 말한다.

“6국의 정치가들이 주도면밀하지 못했고, 안목이 얕았으며, 게다가 천하대세를 알지 못했다. 천하에 중요한 곳은 한나라와 위나라였는데, 두 나라가 진나라의 요로를 가로막아 동쪽의 제후들을 막아 주고 있었다. 옛날에 범수(范?)가 원교근공책으로 한나라를 빼앗고, 상앙(商?)은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한과 위 두 나라를 방어막으로 하여 제, 초, 연, 조 네 나라는 준비하고 있다가 은밀히 두 나라를 도왔어야 했다. 이러한 책략도 모르고 국경의 조그마한 이익만을 탐내어 맹약을 저버리다가 서로 죽이고 말았다. 진나라가 아니라도 천하 제후국들은 이미 스스로 곤궁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여섯 나라를 취하게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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