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청천·오카모도 겐·라과디아의 사례로 살펴본 바람직한 법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지난해 대법원장이 법조비리와 관련해 10년 만에 또다시 국민을 향해 머리 숙이고 사과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청렴성에 관한 신뢰 없이는 사법부의 미래도, 법관의 명예도 없다”고 했다. 바람직한 법관은 어떤 모습일까?

제1화 오카모도 겐 판사

일본의 오사카 고등법원의 형사부 총괄 판사였던 오카모도 겐은 1987년 36년 동안 재직했던 판사직에서 퇴임했다. 큰 사건들을 맡아오던 유명한 판사인 그가 정년퇴임까지 5년이 더 남았는데도 일을 그만두자, 사람들은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엉뚱한 곳을 찾아갔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요리학원이다.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음식점을 내겠다는 각오로 60이 다 된 나이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을 나가 공부를 했다. 그는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칼 쓰는 법과 양념 만드는 법, 야채 써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1년 만에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일하던 법원 앞에 두 평 남짓한 간이음식점을 냈다. 유명한 판사였던 그를 알아보는 손님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모두 판사직을 그만두고 음식점을 낸 것을 궁금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판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 일을 36년이나 해왔던 것이지요. 재판관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식당 주방장이 되더라도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남에게 죄를 정하고 벌을 주는 일이 싫어서 여생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그의 음식점 이름은 ‘친구’다.

드라마 판관 포청천

제2화 포청천

송(宋)나라 인종 때, 포증(包拯)이란 청백리가 있었다. 포청천(包靑天)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천장현 현령으로 있을 때, 한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외양간의 소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놀란 농부는 소의 입을 벌려보니 누군가가 소의 혀를 베어간 것이 아닌가? 농부는 즉시 관청에 달려가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현령에게 간청했다. 현령인들 무슨 수로 범인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궁리하던 포증은 농부의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는 즉시 그 소를 잡아버리게나” 농부는 포증을 한참 바라보며 현령께서 제정신인가 의심했다. 당시는 일할 수 있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도 없거니와 병든 소를 도살할 때도 관청에 보고해야 했다. 농부는 ‘혀가 잘린 소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랴’ 현령이 잡으라고 했으니 관청에 보고도 안하고 집에 도착하여 바로 소를 잡아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어떤 자가 관청에 찾아와서 자기 동네의 농부가 소를 몰래 잡았다고 고해바쳤다. 포증은 그에게 몇 마디를 묻고 나서 갑자기 당상을 치며 호통쳤다. “네 이놈! 남의 소 혀를 잘라놓고 오히려 소 주인이 도살을 했다고 고자질을 하다니! 어서 네 죄를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결국 소 주인에게 원한이 있어서 보복한 짓이었다고 죄를 불었다. 포증은 판관으로 있을 때,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했고, 벼슬이 더 높아진 후에도 검소한 생활로 사사로움이 없이 늘 공평하여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제3화 라과디아 재판관

1930년 뉴욕에서 한 노파가 상점의 빵 하나를 훔쳤다가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관이 노파에게 물었다. “이전에도 빵을 훔쳤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훔쳤습니까?” “일자리도 잃고, 배급도 끊기고, 일주일이 넘게 굶은 손자가 죽어가는 걸 보고···.” 노파는 흐느꼈다. 재판관은 다시 물었다. “당신의 행동이 범죄임을 알지요?” “예, 잘못했습니다.” “그럼 최종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피고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지만 법은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므로 피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런 피고의 사정을 돌보지 못한 뉴욕시민 모두에 연대책임이 있으므로 판사인 저도 10달러의 벌금을 내겠습니다. 이 법정에 앉아있는 시민 여러분도 50센트씩 벌금에 동참해 주실 것을 권고합니다.”

이렇게 모인 돈이 57달러 50센트였다. 10달러는 벌금으로 지불하고, 50센트는 빵값으로 지불하고, 잔액 47달러를 노파에게 주면서 어서 가서 손자들을 돌보라고 격려했다. 법정의 방청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 재판은 뉴욕시민 모두가 공감하는 판결이었고,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은 명재판이었다. 그는 세월이 흐른 후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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