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통일 33] ‘전국시대의 4군자’···맹상군·평원군·신릉군·춘신군

[아시아엔=강철근 한류국제문화교류협회 회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이상설 이야기> 저자] 전국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제후와 군왕 이야기 위주로 했다. 그런데 그들 뒤에는 훌륭한 대부들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뒷받침했다. 그들이 없이는 나라가 지탱될 수 없을 정도였다.

전국시대의 수많은 대부 중에서 4군자가 유명한데, 그들은 △제나라 맹상군 전문 △조나라 평원군 조승 △위나라 신릉군 무기 △초나라 춘신군 황헐 등이다. 이들은 서로 다투어 선비들을 접대하고 빈객들을 초빙하는 데 힘을 기울여 서로 경쟁하여 그 힘으로 나라를 돕고 동시에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제후 왕상 못지않은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가졌다. 사실 이러한 빈객제도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실현방식이었다. 유력자들이 주요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사전에 경청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사마천이 말하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4명의 군자들을 살펴본다.

맹상군

우선 맹상군 전문을 말해본다. 그는 가장 재미있고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강태공이 세운 군자의 나라 제나라에서 재상을 역임했고 식객 3000명을 거느렸다. 초강대국 진(秦)나라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초청해, 진나라에 갔다가 모함을 받아 죽을 뻔한 경험도 했다. 그때 식객 중 한 사람의 기지로 인해 살아남았기에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해졌다.

맹상군 전문은 첩의 아들이다. 제나라 제후 전영이 40명 아들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부친의 재산을 물려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살아남았다. 아버지 전영은 그에게 집안 일을 돌보게 하고 빈객들을 관리하도록 맡겼다. 그러자 뛰어난 빈객들이 더 많이 몰려들어 맹상군 전문의 명성이 제후들에게 알려졌고 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설(薛) 땅을 물려받아 빈객을 불러 모았는데 그 숫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그는 신분이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대우했다.

애초에 아무 재주도 없던 이들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돈 낭비를 한다며 그를 매우 비난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맹상군에 관한 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앞에서 든 ‘계명구도’다. “닭과 개 울음소리를 내는 사람이 식객 중에서 있었는데 그들이 꼭 필요할 때 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평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우했던 맹상군이었기에 식객들은 주군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제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전해지는 고사성어다.

사실 맹상군은 재상으로서 그 인품이 너무 뛰어나 제나라왕이 그를 슬슬 견제하려 할 때, 진에서 맹상군을 재상으로 초대한다는 말이 나오자 잘됐다 하며 얼른 진으로 갔다. 맹상군이 진나라에 재상 노릇하러 갔다가 진나라 소양왕의 변덕으로 좌절되고, 소양왕이 인재인 그를 제나라로 돌려보내기보다 죽여버리기로 작정했다. 이때 맹상군의 빈객 중에서 개 흉내를 내며 좀도둑질을 하던 자가 진 소양왕의 가죽옷을 훔쳐내서 진 소양왕의 애첩에게 바쳤다. 이에 그녀가 맹상군을 풀어 주도록 진왕에게 말해 맹상군은 풀려날 수 있었다. 또한 달아나던 중 빈객 중에서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자가 있어 새벽닭 흉내를 내며, 진왕이 닫아놓은 함곡관의 문을 열고 맹상군 일행은 간신히 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은 현명하고 포용력이 있어 빈객이 수천명이나 되었고,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 두 왕의 재위 때 재상 자리에 3차례나 올랐다. 그에 관한 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모수와 관련된 이야기다.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 도움을 청하고 합종책을 마련토록 하였다.

평원군은 왕의 명을 받고 재능 있는 식객 스무명을 뽑아 초나라에 가는 협상단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는 3000여명의 식객 중에서 적합한 인물을 골라 가까스로 19명을 찾아냈으나 1명이 모자랐다. 한참 고민하던 중 모수라는 이가 나타나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모수자천’(毛遂自薦) 고사다.

평원군이 모수에게 말했다. “현명한 선비는 어느 곳에서도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이를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는데, 선생은 내 수하에 삼년이나 있었는데 그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요?”

모수가 답했다. “공의 말씀이 옳지만 아직까지 저는 주머니 속에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공의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에 다른 19명은 서로 눈짓으로 모수를 비웃기를 그치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평원군은 말이 된다고 여겨 모수를 명단에 포함시켰고 함께 초나라로 가게 되었다.

평원군은 초나라 왕과 합종의 맹약을 협상하기 위해 높은 누대 위의 단상에서 새벽부터 하루 종일 협상을 하였는데, 해가 질 때까지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때 모수는 장검을 비껴들고 계단으로 뛰어올라 평원군에게 말했다. “합종의 이해관계는 두 마디면 결정되는 건데 오늘 이토록 결론을 못 내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에 초왕이 모수의 방자함을 크게 꾸짖었다.

모수는 기죽지 않고 칼에 손을 대며 더욱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왕께서 저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가 큰 나라이고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왕의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옛날 탕왕은 70리의 땅으로 천하의 왕 노릇을 했고, 문왕은 100리의 땅으로 제후들을 신하로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 그 세력에 의하여 위엄을 떨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나라는 땅이 사방 5000리에 군사가 백만으로 패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나라의 강함을 천하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진나라의 백기란 자는 그저 그런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전쟁을 하여 한번 싸움에 언정을 함락시키고 두번 싸움에 이릉을 불태웠으며 세번 싸움에 왕의 조상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는 우리 조나라조차도 수치로 여기는 일인데 초왕은 어찌 수치로 여기지를 않습니까. 합종을 하는 것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왕은 모수의 말에 감동하였다. 조와 초는 합종의 맹약을 하여 진나라를 물리쳤다.

평원군은 합종을 성사시키고 조나라에 돌아온 후 말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선비들의 관상을 보지 않겠다. 내가 그동안 수천명의 상을 보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오늘 모 선생을 보지 못했다. 모 선생은 초나라에 가자마자 조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은 세 치의 혀로 백만의 군대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감히 선비의 상을 보지 않겠다.” 그러고는 모수를 상객으로 대우했다.

이 말은 특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그 이유를 밝힐 때 인용하기도 한 말이다.

“합종을 택한 것은 초(楚)를 위한 것이지 조(趙)를 위한 것이 아니듯이, 오늘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1910년 2월 2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이 글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의 수첩에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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